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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Nov 13. 2022

걸어야겠다



걸어야겠다고, 요즘 들어 자주 생각했다.



어떤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옹기종기 집들이 자리하면서 자연스레 골목길과 모퉁이와 계단이 생겨난 마을을 도시라고 정의할 때, 이곳은 도시가 아닐 것이다. 모든 길과 도로가 자동차를 중심으로 설계된 이 도시에선 걸을 일이 없었다. 걷고 싶어지지 않았다. 걷지 않았기에, 내가 사는 동네를 속속들이 알 수 없었고 이웃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여기와 정들지 못했고 이곳에서의 삶을 사랑할 수 없었다. 애초에 마음 주지 않으려 한 건 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뿌리를 얕게 내린 식물은 튼튼하게 자랄 수 없다. ‘자기 몸과 감각, 물리적 환경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방향감각을 잃기 쉽다.’* 운명처럼 한 문장과 조우하고 나니 문제가 무엇인지 더욱 명료해 보였다. 나의 외로움의 근원이 이거였구나. 내가 내 몸과 멀어지고 있어서. 엉킨 마음들이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가는 것도 그래서였구나.



걷는 동안 풍경은 나를 통과하는 방식으로 지나간다. 불어오는 바람은 어떤 냄새를 내게 각인시키고 피부에 닿는 습도와 온기는 계절을 전한다. 어떤 풍경은 빠르게 지나쳐가고 어떤 풍경은 오래 머문다.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풍경들은 거꾸로, 바라보는 이의 내면을 풍경처럼 그려 보인다.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우리의 시선 안에 머문다. 나의 시선은 어디에 가 닿았나. 어디 오래 머물렀나. 그러는 사이 나의 내면에선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생각과 마음들이 부유한다. 어떤 것은 붙잡아 두고 어떤 것은 흘려보낸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과 생각이 마음속을 지층처럼 오가며 느리게 쌓여간다. 거리를 걷다 보면, 마음 안에도 모래가 불어와 쌓이고 모난 곳은 바람에 깎여나갔다. 마음의 표정이 알게 모르게 조금 달라져 있었고 그런 시간이 쌓이면 마음의 지형이 어딘가 변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쌓여 공간을 이룰 때 멀리서 바라보면 비로소 커다란 무늬를 이루는 일이었다. 걷는 일은 그래서, 마음을 씻어내고 마음을 돌보는 일이 되었다.



걷는 일이 시급했다. 몸과 맘이 나란히 발맞춰 걸을  있도록 망가진 몸의 감각을 회복해야 했다. 이럴  조금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정하고 가야 하는 등산이 아니라 가볍게 나서는 트래킹 정도가 좋겠다고. 매일 새로운 언덕을 발견하고  언덕에 올라가 보았던 터키 여행을 떠올렸다. 함께 여행했던 친구가, 내가 언덕만 보면 올라가자고 해서 너무 힘들었다고 뒤늦게 고백한 일도 떠올랐. 솟아오른 지형을 보면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어쩌면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꼭대기에 올라서서 작은 봉우리 하나를 정복했다거나 풍경을 장악했다는 기분에 취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에 점점  숨이 차오르는 느낌, 종아리가 땅겨오는 느낌, 몸이 활짝 열리는 느낌이 좋았다.  안에서 심장이 뛰고 있다는 , 종아리 속에 팽팽한 근육이 감춰져 있다는 ,  순간 온몸의 세포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느낄 수가 없는 거니까. 경사진 언덕을 조금만 올라가도  아래 세상이 한없이 멀어져 보였다. 내가 속한 세상에서 멀리 떠나온  같은데도 외롭지 않았다. 돌아본 풍경은 언제나 상상 밖으로 아름다웠다. 어느새 정상에 오르면 마음 놓고 숨을 고를  있었고, 숨을 고르고 나면 돌아가고 싶어질 터였다. 내려가는 일은 훨씬 가볍고 수월할 것이었다.  

 


오르기를 좋아하는 건 어쩌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모래산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집 마당은 아빠의 일터와 이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엔 어른 키의 두 세배 높이로 모래더미가 쌓여 있었다. 내 유년의 감각 속엔 까슬까슬한 모래와 밀가루보다 더 곱고 부드러운 시멘트가 있다. 매일 밤 엄마는 내 몰골에 기겁하고 나를 씻기려 들었지만, 나는 모래와 흙먼지를 원 없이 만지며 자랐다. 발이 푹푹 빠지도록 모래산을 오르고, 그 모래산에 신발을 숨겼다가 찾을 수 없어 이곳저곳을 파헤쳐 보고, 먼저 꼭대기에 올라서서 모래에 푹푹 파묻히며 노는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미끄러지듯 단숨에 슝 내려오거나 발이 푹푹 파이도록 성큼성큼 뛰어 내려오다가 몸 전체가 모래 속에 고꾸라지는 일은 즐거웠다. 입 속에서 까슬거리고 발가락 사이에 붙어 반짝거리며 씻어도 잘 떨어지지 않던 모래알의 감촉. 나의 하루는 모래의 감각으로 채워져 있었다. 엄마의 품보다 모래에 안겨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올라가는 일에는 어떤 공통된 기대가 담겨 있다. 그 기대란 오르는 방향에 따라, 높이에 따라 계속해서 달라질 풍경을 마주하는 일이다. 돌아볼 때마다 달라지고 또 넓어지는 풍경 속에서 지나온 것들이 작아져 간다.”

<우울이라 쓰지 않고> (p.56) (문이영, 오후의소묘, 2022)

 


지금의 나에겐 무엇보다, ‘작아져’ 가는 마법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애쓰고 넘치게 마음을 쏟았던 일. 걱정과 불안에 지던 날들이 작아져 갔으면, 그러다 잊히기도 했으면 좋겠다. 주말엔 어디라도 나가서 걸어야겠다. 풍경 속으로 잠시 사라져도 좋겠다. 사라졌다 돌아와 이 장소를 새롭게 발견하고 싶다. 내가 사는 이 장소와 정들고 사랑할 힘을 메마른 내 우물에서 길어내고 싶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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