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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리비 May 24. 2024

‘좋은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매리언(*)은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혼자 보내는 시간보다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발벗고 나서는 편이죠. 내 몸 조금 불편하더라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기쁘면 그만이니까요. 회사 일로 바쁜 남편에게 잔소리하기 싫어서 집안일은 그냥 혼자 도맡아 하는 편입니다. 매리언도 회사 일로 몸이 항상 피곤하지만, 자기가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될 일이거든요. 회사에서는 언제나 밝고 친절하면서도 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매리언에 대한 상사의 기대가 큽니다. 다른 직원들은 워라밸 챙긴다며 바쁜 철에도 휴가를 내지만, 매리언은 책임감이 있어 끝까지 남거든요.

어느날인가부터 매리언은 이유 없이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뜬금없이 눈물이 올라오는 날도 있구요. 그러다가 몸에서 원인 모를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해봤지만, 검사 결과는 전부 정상이라고만 합니다. 밴쿠버에는 의사 말고도 다양한 분야의 의료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이중 몇몇이 매리언한테 감정적 스트레스를 잘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심리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매리언은 현실 속 여러 사람의 성격을 배합한 허구의 인물입니다.


나는 언제나 주변에 베풀지만, 주변에서는 그만큼 신경 써주지 않아 서운했던 적이 있었나요. 평소 나의 욕구를 후순위로 두고, 주변 사람들의 욕구에 따라 움직여주는데도,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낀 적은요. 매리언은 평소 남을 위해 희생 정신을 발휘하는데 익숙하지만, 정작 자기 욕구를 알아차리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에는 미숙합니다. 자기 욕구를 존중하는 법을 잘못 배웠기 때문이죠. 작은 서운함들이 스트레스로 켜켜이 쌓여, 결국 마음의 병과 함께 몸의 병도 함께 불러온겁니다. 매리언은 이런 자기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진정한 자기를 외면하다 보니, 몸에서 못 견디고 반란을 일으킨 거죠.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심리 이면에는, 이렇게 '좋은' 일만 하는 나를 누구든 차마 버리지는 못할 거라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볼비와 에인스워스의 애착 이론 (Bowlby, 1990)에 따르면, 어린 아이는 부모로부터 버림 받을 수 있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이 무의식 속에 있다고 합니다. 조건부식 사랑을 주는 부모를 만난 아이는, 부모의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런 아이는 부모의 관심과 공감을 통해 자기 욕구를 알아차리고 적절히 해소하는 연습보다는, 부모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부합하는 연습이 잘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자라난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 욕구에 대해서는 신기할 만큼 무디면서, 타인의 욕구에는 민첩하게 반응합니다. 분명 피곤해야 할 타이밍인데 괜찮다고 우기며, 분명 쉬어줘야 할 시간인데 아무렇지 않다며 밀고 나가는 사람들 있죠. 이런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내가 이렇게 나를 희생해가면서 남에게 잘 해주면, 내게도 필요한 사랑이 어떤 형태로든 돌아올거라는 막연한 공식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나의 관심과 배려를, 남에게 사랑 받기 위한, 교환 가치가 있는 매개체로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냉철하게 말해볼까요. 이런 사람은 상대방을 그 자체로 소중한 목적으로 대하기보다는,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대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들에게 베풀며 사는 것에서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자기 욕구와 남의 욕구 간에 균형 잡는 법을 오랜 세월에 걸쳐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욕구를 잘 해소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은 나의 잔이 흘러넘치는 상태에서, 남에게도 여유롭게 베풉니다. 그리고 남에게 베푸는 만큼 결핍이 생기는, 제로섬식 게임을 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사람' 전략은 왜 자기 결핍을 채우는 데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육감이 있어, 상대가 나를 그 자체로 좋아하고 긍정해주는지, 나를 자기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대하고 있는건지, 순식간에 알아 차리는 것 같습니다. 매리언 같은 사람을 만나면, 고맙기는 하지만, 묘하게 불편하거나 거리감이 느껴진달까요. 온갖 정성과 배려를 쏟는 것 같아 몸둘 바를 모르다가도, 정작 나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잘 관찰해보면, 대화의 주제가 나와 너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관계를 확인하는데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공들인 관계에서 자기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삶에서 갈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정말 나쁜 사람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건강하게 주고 받는 관계 능력이 없는 '좋은 사람'은, 극단적으로 자기만 챙기는 식으로 돌아서기도 하고, 혹은 건강하지 못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점점 불행해진 자신을 내버려두기도 합니다.


매리언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기가 알아차리지 못한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원인 모를 통증에서 자가 면역병까지 가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자기가 힘들 때를 잘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런 식의 알아차림을 이기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고 관점을 바꿔보는 것도 좋습니다. 어린 시절 나의 가치를 조건부로 학습하였다 하더라도, 이제는 내가 나를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부터 스스로에게 다시 학습시켜야만 합니다. '좋은 사람' 마인드로 오래 살아온 사람일수록, 이런 알아차림의 순간들이 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불편할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매리언은 또한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감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겁니다. 상대와의 관계를 나의 '쓸모'에서부터 시작하기 보다는, 상대에 대한 진정어린 관심을 갖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상대는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의외의 매력이 있는 사람인지, 어떤 관심사를 가진 사람인지와 같은, 상대 고유의 특성에 집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나 또한, 상대에게 필사적으로 나의 유용함을 증명하려는 본능을 가능한 억누르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바라보고 시공간을 함께하는 기분을 만끽해보는 것도 좋구요.


주변 사람들의 욕구에 무조건 응해주는, '상대방을 위한' 행동 대신, '행복한 우리 관계를 위한' 행동에 에너지를 쏟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나'의 결핍과 '너'의 관심 간의 교환을 염두에 둔 거래가 아닌, '우리'를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한 투자 마인드로 전환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관계를 가꾸는 일은 마치 나무 한 그루를 길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나무를 심고 보살피다 보면, 언젠가 그 나무가 자라나 우리 모두에게 그늘도 과실도 원목도 제공해주는 개념입니다. 우리 함께 가치관을 공유하고,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공유하고, 추억을 하나하나 쌓아나갈 때 나무는 튼튼하게 자라납니다.



연습 1. 평소 주변 사람들의 언행에 불만이 많았다면, 그 불만의 기준이 되는 잣대를 구체적으로 적어보기.


연습 2. 내가 그들과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 잣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고 적어보기.


연습 3. 위에서 알아낸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어떤 결핍을 채워주는지 생각해보고, 그 결핍을 다른 방법으로 채울 수는 없는지, 10가지만 브레인스토밍 해보기.


참고.

Bowlby, J. (1990). A secure base: Parent-child attachment and healthy human development.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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