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풍경 속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언어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알게 모르게 지치기 마련입니다. 간절히 원해서 시작한 해외 생활이라도, 가끔은 긴장감을 내려 놓고 쉴 수 있어야만 도전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외 생활 중에도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는 나만의 안전 기지 (secure base)가 필요합니다.
안전 기지란 단어는 애착 이론을 개발한 발달 심리학자 메리 에인스워스가 처음 명명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Bowlby, 2005). 어린 아이는 호기심이 많아 주변을 탐색하다가도,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와 안정을 취하고는 다시 또 탐색에 나섭니다. 이때 엄마는 아이가 자신감 있게 모험을 할 수 있도록 안전 기지가 되어줍니다.
저는 어른에게도 안전 기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마 품으로 돌아가는 옵션이 없어진 나이에는,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받았던 안정감을 나 자신에게 대신 챙겨주는 연습을 통해 스스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면 불안정 애착을 가진 사람도 안정 애착 유형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도 하구요 (Fern, 2020).
내게 스스로 안정감을 주는 방법에 대해 Polysecure의 저자 제시카 펀은 5가지로 정리합니다 (Fern, 2020):
첫째, 내 몸과의 연결감 회복하기. 한국에서는 자동으로 주어졌던 가족의 도움, 익숙한 시스템과 절차가 사라지면서 처음부터 열까지 내가 다 해결해 나가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위기감에, 일단 살고 보자는 마인드가 강해지죠. 그렇게 일상에 치이다 보면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묵살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어린 아이에게 하듯, 나의 몸에서 느껴지는 반응들을 세심히 살피다 보면, 나만큼은 나를 아낀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일 수도 있고, 또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을 알아차리고 그 욕구를 채워줄 수 있게 됩니다.
둘째, 나를 사랑스러워하기. 바로 오그라드나요? 아니면 마음이 푸근해지나요? 전자라면, 나는 평소 나를 매우 박하게 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엄마는 어린 아이가 온 집안을 뒤엎어 놓는 만행을 저질러도 한번 방긋 웃어 보이면 바로 또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아이는 잘한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는데,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나를 마지막으로 사랑스러워 해본게 언젠가요? 기억도 안날 정도로 오래 전 일이라면, 하루 날 잡아 내가 즐거워할 만한 나와의 데이트를 계획해보는 것도 좋구요, 아니면 내가 사랑스러운 이유를 거울 보며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셋째, 자기 인식 (self-attunement), 혹은 내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기. 엄마가 아이 눈높이에 맞춰, 아이의 세상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다 보면 아이가 내면 세계를 가지런히 정돈하는 능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헷갈리고 예측 불가능한 곳이 아닌, 감당할 만한 도전이라는 자신감도 함께 생긴다고 합니다. 우리는 의외로 많은 시간을 나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나를 채찍질해 생산성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려는 마음으로 보냅니다. 나를 쥐어짜는 걸 잠시 멈추고, 지금 내게 떠오르는 생각, 내가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향유하며 구체화 시켜 보는 건 어떨까요.
넷째, 내게 맞는 루틴을 개발하기.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하루를 15분 단위로 쪼개어 계획한 후 한두 주 버티다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그런 무리한 루틴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나의 몸과 마음에 주파수를 정확히 맞추었을 때에만 알아차릴 수 있는 고유의 바이오리듬에 따른 현실적이고 유지 가능한 루틴을 말합니다. 나의 수면 패턴, 운동 욕구 등 다양한 니즈를 세세히 파악하여 균형 잡힌 루틴을 만들어 나간다면 나에게는 예측 가능한 스케줄이 주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아이의 니즈를 미리 파악하여 낮잠 자는 시간, 노는 시간, 먹는 시간을 정해 루틴을 정해주듯이요.
다섯째, 나 자신과도 잘 화해하기.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머리가 하는 작은 실수에도 손발이 엄청 고생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럴 때마다 나를 탓하며 자책하기만 한다면, 내 마음 속 안전 기지여야 하는 곳에 수치심이라는 적을 잠입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수치심을 불러 들이기보다는, 내가 잘못한 게 있을 때는 나를 잘 타일러 가능한 문제를 해결해 보고, 나 자신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엄마는 아이가 잘못했을 때 벌을 주기도 하지만, 끝나고 나서는 한번씩 꼭 안아주듯이요.
이렇게 내 마음 속에 안전 기지를 잘 구축한 사람은 해외 생활 중에도 내 마음 속 지하 벙커 같은 곳이 생기는 겁니다. 밖에서는 지지고 볶다가도, 안전 기지 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무언가를 더 하고, 또 잘 해야만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있어도 됩니다.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내가 하는 일은 결국, 언젠가는 다 이래저래 잘 풀릴 거니까요. 억지 긍정이 아닌, 조용한 앎이 흐르면서 나는 괜찮을거라고 말해주는, 엄마 품 같은 그런 곳에서 매일 잠깐씩 쉬어가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연습1. 나의 가장 큰 걱정거리 3가지만 적어보기. 그리고 10년 후에도 이 걱정을 하고 있을지 되물어보기.
연습 2. 오감을 총동원하여, 내가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감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기. 그리고 이중 하나를 나 자신에게 선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참고.
Bowlby, J. (2005). A secure base: Clinical applications of attachment theory. Routledge.
Fern, J. (2020). Polysecure: Attachment, trauma and consensual nonmonogamy. Thornapple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