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홈리스와 Mrs. 존슨
(1편에서 이어집니다.)
서울, 도쿄, 파리, 뉴욕 같은 대도시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뉴욕은 문화적 다양함에 미국이라기보다는 국제도시 같은 느낌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커피숍이나 공원에 앉아 다양한 캐릭터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인기 티브이쇼 보듯이 흥미롭게 바라보곤 한다. 한국의 한 도시에서 자랐고 그래서인지 대도시 뉴욕의 번잡함을 즐겼다.
그런데 LA에서 태어난 내 아이들은 대도시의 그 번잡함에 웃음기 잃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엘에이 지역은 길거리 걸어 다니는 일이 적다. 즉 공중 쓰레기, 껌딱지등이 널린 거리의 지저분한 광경을 보거나 바람에 솔솔 얹혀 다가오는 앞서가는 이가 피운 담배연기를 맡을 일도 없다. 또한 빠른 걸음으로 가던 타인과 부딪히는 등 사람들과 부대낄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도 없다. 피아노 학원을 가도, 동네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가더라도 부모나 가디언의 차를 타고 이동할 수밖에 없다. 걸어가기엔 멀고, 특히 여름에는 더워서 걸어 다닐 수도 없다.
그래서 특정 지역이나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기 어렵다.
그건 LA 도심도 마찬가지다. LA 다운타운 같은 상업지역은 주중에는 그나마 북적북적 사람들이 걸어 다닐지 몰라도 주말이면 유령도시다.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부대낄 곳은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같은 놀이동산뿐.
인적이 드문 엘에이의 빈 거리.
그 뜻은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특히 요즘 LA에는 폭력적인 *홈리스들이 많아서 험한 뉴스가 많이 들린다. 그래서 아이들이 혼자 길거리를 다니게 해선 안 되는 점도 있다.
LA 대중교통 시스템도 지역 전역을 커버하지도 못하지만, 설령 이용한다 해도 일반인에게 안전하지 않다.
넓은 지역 특성상, 그리고 안전을 위해 아이들은 개인 교통수단으로 이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어린이들이 지하철 같은 곳에서 사람들 틈에 부대껴 본 경험도 없고, 낯선이와 길거리에서 대화를 해본적도 없다.
자연스레 골목길에서 친구와 놀고, 도시 번잡함속에 혼자 등하교를 하였으며, 학교 앞 문방구에 들러 쇼핑을 하고 떡볶기와 어묵국물을 먹으며 이모님의 거스름돈 계산으로 경제활동을 익히던 한국에서의 유년시절과 다른 세상에 사는 내 아이들이다.
(뉴욕)
어린이들에게 캘리포니아 지역은 한적하고, 안전한 곳이라 양육시기에 좋긴 하다.
하지만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할 기회조차 없는 내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사람과 부대끼는 도시에서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행 때 아이들에게 도시 경험을 하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만약 아이들이 대도시에 살았다면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경험을 접하게 했을 것이다.)
2019년도에 6살 난 첫째 딸과 둘이 뉴욕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아이는 맨해튼,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낮에도 길거리에 쌓여있던 거대한 음식물 쓰레기 검은 더미들, 거기서 풍기는 냄새, 쓰레기에서 흘러내려온 액체와 누군가가 노상방뇨한 오물이 마른듯한 얼룩진 길거리 바닥. 옷깃을 스치듯 지나가며 코를 훅 찌르는 낯선이의 땀냄새와 섞인 데오드란트 냄새, 진하고 자극적인 싸구려 샴푸 향기나 그 집에서 태울거 같은 향냄새. 아이는 모든것을 힘들어했다. 그것을 좋아할 어른도 사실 없지만, 그래도 더 많은 도시의 장점을 설명하고 보여주며 아이와 맨해튼을 돌아다녔다.
안타깝게도 내가 살던 시기 (쥴리아니 시장 때) 와 달리 도시가, 특히 미드타운이 상당히 지저분해지고, 도시 분위기가 다른 건 사실이다.
엘에이에 비해 계속 걸어 다녀야 하고, 친절하지 않아 보이는 뉴요커들의 무표정도 아이눈에는 무서워 보이고, 아이는 재미보다 불편함과 투정으로 가득 찼다. 그나마 센트럴파크에 가서야 바위를 기어오르고 놀이터에서 뛰어놀며 즐거워하였다.
아이가 커서 무슨 일을 할지 모르지만, 대중을 이해하고 알아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아이가 불편해하더라도 도시를 여행할 때는 되도록 택시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못해본 일을 여행에서 경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여행이 재미있지 않은가.
맨해튼을 가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곤 한다.
첫째 아이는 유아시절부터 여행 시 항상 '핑크멍키'라는 핑크색 원숭이 인형을 데리고 다녔는데, 손바닥에 찍찍한 벨크로가 붙어 있어 인형 팔을 둘러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하고, 품에 안거나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날도 핑크멍키를 목에 걸어 안고, 지하철을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자리가 없어 아이만 앉히고 나는 서있었다.
" Hey, I like your pink monkey. It's cute!"
곁에 한 여자분이 아이의 핑키가 귀엽다며 말을 걸어왔다. 베이지색 허리라인이 들어간 수트에, 뒤로 단정히 말아 올려 묶은 머리, 밝은 갈색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백인이었다. 전형적인 오피스룩이지만 어쩐지 일반 뉴요커와 달리 밝은 컬러의 수트다. 그녀의 이름은 존슨(가명) 이란다. 사실 무릎이 닿일만큼, 서로의 큰 숨을 느낄 만큼 아이와 그녀, 두 사람 자리는 가까웠다.
여행지에서 옆자리에 앉은 처음 본 낯선이가 본인에게 직접 걸어온 대화.
Mrs. 존슨의 물음에 아이의 리액션이 궁금해 잠시 바라보았다. 내가 살짝 긴장되었다. (이게 뭐라고.)
아이는 예의 바르게 바른 목소리로 이야기할지, 대답을 안 하고 그녀를 쳐다만 볼지, 혹은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볼지...
6살 아이는 쑥스러운지 모기 목소리로 "Thank you" 그런다. 그런데 Mrs. 존슨이 곁에 동료를 잠시 두고 아이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 얼굴로 아이에게 다시 말을 건다. 기어들어가는 아이의 말을 잘 받아주면서 두 사람이 대화를 하였다. 어디 사느냐, 뉴욕 놀러 왔냐, 아줌마는 무슨 일을 하느냐 등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면서 두 사람이 알콩달콩 대화를 하였다.
알고 보니 그녀도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자녀들이 있단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디즈니 컴퍼니, 뉴욕오피스에서 일하던 분이셨다. 어쩐지...
주로 뉴요커들은 지하철에서 옆에 낯선이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세스 존슨이 아이에게 준 경험이 값졌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또록또록 대화를 해가는 6살 딸을 보니 코끝이 찡 했다.
아이가 엄마의 도움 없이 저렇게 소통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신기했다.
아이도 작은 경험을 했지만 엄마도 같은 상황을 지켜보며 주고 싶었던 그 작은 경험을 하게 되었음이 감사했다
미국에 살다 보면 가정 교육을 잘 받은 백인이나 흑인 아이들의 매너 있는 대화에 놀랄 때가 가끔 있다.
그들은 내게 다가와 적절한 목소리 크기와 톤으로 본인 소개를 하고 악수를 청하며 대화를 시작하기도 하고, 내 물음에 또롱또롱 대답을 하며 질문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나름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내가 자라면서 배워오던 문화는 어른을 만나면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지 않고 조금 아래를 쳐다봐야 했다. (미국과 반대) 오고 가는 대화보다 어른의 질문에 대답하는 분위기. 어른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인사만 드리고 빠지기. 궁금해서 질문을 많이 하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이런 보수적인 유교문화 안에서 커온 내가 바뀌긴 어렵다. 그렇게 유교문화와 미국문화 사이에 많은 오해를 사면서 여전히 이곳 문화 습득에 노력하며 살고 있지만, 아이들 교육은 어렵다. 아이들은 엄마의 매 순간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면 쑥스러워도 감출 수 있는 낯가림을, 아이들은 느낌으로 엄마의 숨긴 얼굴 붉히는 감정을 알아채는 거 같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쑥스러워하는 모습보다, 눈빛을 교환하고 매너 있는 모습으로 어른들과 소통을 하는 미국아이들을 만나면 나도 내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고픈 마음이 크다.
2019년 같은 여행에서 아이가 뉴욕을 싫어하게 된, 아니 성당, 교회까지 싫어하게 된 계기가 한 사람으로 인해 생겨버렸다.
당시 아이와 단둘이 갔던 뉴욕 여행이라 엄마의 추억이 깃든 곳들을 보여주었다.
엄마가 20대 때 커피를 들고 걸어 다니던 거리, 학교, 회사, 뮤지움, 공원, 마켓, 커피숍등.
그중 한 곳이 내가 힘들 때 가던 작은 성당이었다.
개인적으로 5가에 위치한 성 패트릭 성당과 이 작은 성당을 좋아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Madison square garden 근처, 32가 길에 작은 성당이 있다.
188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성 프란치스 **St. Francis of Assisi라는 성당으로 작고 오래된 성당이다.
이곳은 일반 성당과 달리 신부님들이 갈색 의복을 입고 계신다. 그 분들은 수도사님들로, 이 성당은 다른곳에 비해 이른 시간, 일정 시간이 되면 성당문을 잠궜다. 무심코 지나치면 그곳에 성당이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다.
정문이 있는 31가에 바라보면 깔끔하게 관리된 작은 오래된 교회 건물을 알아볼 수 있지만, 후문이 있는 32가 쪽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어렵다.
후문으로 가면 지하 미사실로 연결되어 있고, 일반 교인들이 바쁜 뉴욕생활에서 잠시 들러 기도를 하거나 주중 미사를 드리기도 한다.
나는 주로 자주 다니던 길인 32가 후문을 사용했던 지라 그날도 아이를 데리고 그리로 들어갔다.
지하 미사실로 내려가 아이에게 성당 설명을 하고 기도를 드린 후, 초에 불을 켜기 위해 헌금통에 몇 불을 집어넣으려던 찰나...
갑자기 바로 뒤에 한 남자가 섰다.
그를 보는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아이 얼굴을 보며 나도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그 남자는 손 닿는 거리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나와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사실 나 또한 너무 놀라 어떤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로 훅 들어왔다.
떡지고 덥수룩한 밝은 갈색 머리에, 때 묻은 얼굴과 더러운 정장 쟈켓을 걸쳐 입고, 유쾌하지 않은 냄새를 풍겼다.
홈리스였다.
평소 뉴욕 거리에 홈리스들이 길거리에 있긴 하고, 성당 입구에 가끔 있었던 적도 있지만 이렇게 성당 내부로 들어와서 교인을 위협한 적은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아이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고, 성당 내라 교인으로서 그에게 무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척 당황하였다.
징징거리는 말투로 그 돈 자기에게 달라고 떼쓰며 무작정 우리에게 다가왔다.
순간 주머니에 무언가 숨기고 있어 아이를 해할까 겁도 났고, 혹은 마약을 해서 어떤 폭력을 행사할까 봐 두려웠다. (미국 홈리스들은 마약으로 인생이 바뀐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편으로 교회가 홈리스들에게 휴식을 주는 건가. 이전에는 홈리스들이 본당 내부에 죽치고 있지는 않았다. 교인을 위협하고 교회의 헌금을 날치기하는 홈리스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을 도우란 뜻인가.. 혹은 뉴욕의 치안이 이리도 엉망이 되었다는 뜻인가. 1초 동안 온갖 생각이 들었다.
모든 종교를 다 포함해서 아이는 그날이 생애 처음 신을 모시는 공간에 들어간 거였다.
그런 교회안에서 홈리스가 아이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난장판을 만드는 험한 경험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갈등을 피하고픈 엄마 마음을 알고 저 홈리스는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교회에서 막지 않은 사람이니 이유가 있겠다 싶어 교회 헌금통에 넣으려던 지폐를 그에게 얼른 넘겨주었던 거 같다. 교회에 헌금하기 위해 다시 지갑을 꺼낼 용기도 없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안고 아이 손을 잡고 최대한 차분한 척 교당을 나왔다.
지폐 몇 장을 받은 후 그가 무슨 말을 한지 기억도 안 난다. 마구 고마워하거나 God bless you라는 흔한 말을 했던 것도 아닌 거 같다. (그 정도 정신이면 본인에게 따뜻한 장소를 제공하는 교회로 갈 헌금을 갈취하지 않고, 교당 밖에서 구걸할 거다)
내가 고맙다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성당에 고마워해야지.
평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도 아니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주변에 기도를 드리던 교인들이나 방문객들이 우리를 도와줄 틈도 없었다.
뉴욕도 이렇게 변하는구나.
차가워 보이지만 합리적인 친절함을 장착하고 있던 뉴욕이었는데, 이제 남일에, 특히 약한 아이에게 조차 도움이나 위로 한마디 해 줄 생각도 없이 흘끗 쳐다보고 마는 모습에 서운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의 제 2의 고향인데말이다.
걱정스러웠던 건 딸아이였다.
역시나 얼음처럼 얼어붙어 있던 6살 딸아이는 성당을 빠져나오자마자 그런다.
"뉴욕도 싫고, church도 싫어. 집에 가자!"
그 여행에서 부모가 아닌 아이를 보호하는 가이드로서의 내 모습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항상 남편을 동반했던 가족여행이었기에 그의 부재가 그리웠다.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니 혹여 그 홈리스를 자극할까 봐 아이 앞에 막아서며 전투자세를 취하지 않았는데, 반면 놀란 아이눈을 가리지 못했던 점이 아쉬웠다. (헌금함에 돈을 직접 넣고 있던 아이는 나와 살짝 거리가 있었다.)
교인으로서는 적절한 행동 같았지만, 보호자로서는 적절치 못했던 거 같다는 반성과 배움의 작은 사건이었다.
다행히 그 후 몇 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 뉴욕을 다시 방문할 수도 없었고, 아이는 성장하였다.
다른 모습의 성당에 가서 기도도 드린다.
하지만 그 기억은 또렷이 아이 속에 남아있다. 그래서 10살이 된 첫째 아이는 여전히 뉴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 성당은 여전히 안전한 곳입니다. 주일에 한국미사도 있지요. 이전에 그런 일이 전혀 없었으므로 해프닝으로 언급했던 내용이었습니다. 뉴욕 성당에 대한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
뛰어난 경관과 예술적인 공간이자 '사람과 관계'에 대한 생각을 이끌어준 원 밴더빌트를 빠져나와 ***미슐랭 스타를 받았다는 한식당으로 향했다.
코리안 바비큐집이 처음 미슐랭 스타를 받았다는 점도 놀랐지만, 이 국제적인 곳에서 그런 명예를 받은 한국 레스토랑이 있음에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미슐랭이 인정한 한식맛은 무엇인지 궁금해서 찾아갔다. 뉴욕 중심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엔 뉴욕만 한 곳은 없다.
그곳은 인터내셔널 시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 인종과 문화, 음식, 직종이 가득한 곳이다.
아마 아이가 커서 20대가 되어 그곳을 간다면 또 다른 즐거움을 만끽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마냥 깨끗하고 이쁘고 친절한 곳만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함이 존재하고, 그 다양함을 수용하고 인정하며 즐기는 마음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아이에게 해주었다.
아이들의 영유아시절은 세상의 아름다움만 보여주고 싶었고, 그리 하였다.
초등 저학년.
이제 조금씩 세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세상의 아픔과 어려움, 혼잡 그 속에서 찾는 소소한 배움과 기쁨을 찾고 경험해 가는 과정.
부모가 제아무리 가려도 아이는 점점 세상의 모습에 눈을 떠간다. 부모가 완벽히 가릴 필요는 없는듯 하다.
달리는 차 안에서가 아닌 홈리스를 눈 앞 가까이에서 본 아이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 후 아이의 질문도 시작되었다.
"저 사람은 왜 홈리스가 된 거야..?"
세상의 안타까움, 어둠, 슬픔도 보게되는
그런 여행이 시작되는 듯하다.
감각적이고 모던한 코리안바베큐로 저녁을 거하게 먹은 일행은 우리 가족 여행의 묘미인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무엇을 먹을까..
남편과 아이들은 약속한 마냥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호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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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에 언급했던 장소들입니다.-
* 매디슨 스퀘어 가든 Madison square garden
농구와 대형 콘서트를 치르는 곳이다.
맨해튼에서 뉴저지와 롱아일랜드등의 거주지역으로 가는 통근용 기차역을 끼고 있고 (Penn station), 지하철역도 연결되므로 미드타운 중심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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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Francis of Assisi in Manhattan
1884년에 지어진 수도승들이 계시는 캐톨릭 성당. 맨해튼 미드타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성당이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코리안 바비큐 한식당, 꽃 COTE - 예약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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