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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verly Story Nov 07. 2023

아무수다 - 콩나물

알콩달콩 더 친해지는 우리

요즘 아침, 저녁 날씨가 꽤 쌀쌀하다.

캘리포니아의 낮은 여전히 26.6도 (화씨 80도)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있지만, 일교차가 심한 탓에 감기가 유행이다. 이럴때는 따끈한 국물류를 가족들에게 요리해 준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아이들은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초등학생 큰 딸은 나보다 김치를 더 잘 먹는다. 국도 잘 먹는데, 겨울철 자주 먹는 국종류로는 곰탕, 설렁탕, 갈비탕, 육계장, 우거지 갈비탕, 소고기 무국 그리고 최애로는 미역국이 있다.  


저녁을 다 먹고 정리 후, 내일 아침 메뉴인 소고기 무국을 준비하였다.

큰냄비에 소고기를 볶다가 육수와 국간장을 부었다.  원래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넣고 끓였는데 최근에 그게 건강에 좋지 않다는 뉴스를 본 후 참기름은 스킵. 그리고 무를 얇게 썰어 적당한 사이즈로 조각을 내어 그 냄비에 담고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아차 콩나물!

작은 두봉지의 콩나물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식탁에 올렸다. 그리고 혼자 다듬는 동안의 무료함을 달래려 아이패드를 세우고 ‘나혼자 산다‘, 티비 프로그램을 틀었다. 기안84가 한참 힘들게 마라톤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콩나물을 봉지에서 꺼내 쟁반위에 펼치고, 힘들어하는 기안84의 마라톤에 눈을 고정시키고 콩나물을 다듬기 시작하려는 찰나, 작은 두손이 곁에서 슬그머니 나타났다.

돌아보니 어느새 8살 막내딸이 옆자리에 앉아 콩나물에 손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잘 준비 안하고 뭐해?“


“Can I..? Please~”


함께 콩나물을 다듬고 싶어서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 보았다.

네.. 막내는 사랑입니다.

그 얼굴을 보면 No를 할 수가 없죠.


잠을 자기 싫어서, 엄마가 보는 한국 티비를 보고 싶어서,  엄마 곁에 있고 싶어서,, 혹은 이 모든 이유로 내 곁에 앉아서 눈을 반짝이는 아이를 침실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분 정도만 함께 다듬자고 허락을 하였다.


쪼꼬만 꼬맹이가 생각보다 손이 빨랐다.

콩나물 꼬리도 척척 떼고, 껍질도 잘 골라 내고, 속도도 은근 빨랐다.

언제 이렇게 컸데...

그러면서 티비 속 저 아저씨(기안84)는 왜 저리 힘들어하냐, 얼만큼 달리냐등 질문도 많았다.

덕분에 딸아이는 마라톤이 얼마나 힘든 스포츠인지 알게 되었다. 비록 42.195km가 얼만큼 먼 거리인지는 전혀 가늠하지 못했지만, 일단 티비 속 아저씨의 눈물 겨운 완주 과정을 보니 어려워 보였다.

와중에 아이는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콩나물 꼬리 따기에 바빴다.


모든 콩나물을 다 다듬은 후, 아이는 잔여물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아주 즐거워하기에 식탁이 엉망이 되어도 그냥 두었다. (그래도 유아기 시절 감각놀이때 보다는 훨 깨끗하다.)

콩나물들과 껍질들이 죽이 되기 직전까지 뭉그러지고, 손가락 사이며 주변은 온통 엉망이었다. 감각놀이가 따로 없었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집은 가문의 장손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장남이라 직계 가족의 제사를 지냈다.  추석, 설날같은 명절들을 포함 일년에 거의 매달 제사가 있었다. 명절, 제사외에 계절마다 집안 큰 이벤트들도 있었다. 그 이벤트로는 김장, 콩으로 메주 만드는 날, 정원 대보름, 가끔 추석에 송편 만들기, 그리고 동지 팥죽을 먹기위해 옹지종기 머리를 맞대고 세알을 만들기도 했었다.


제사나 명절때가 되면 막내였던 나는 항상 심부름 전담이었다.

제삿상에 올라갈 탕국을 끓이다가 두부가 모자라면 달려가서 두부 한모를 사왔다. 고기가 모자라면 정육점에가서 고기를 받아다 오고, 콩나물이 필요하면 달려가서 사왔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콩나물은 봉지에 들어있지 않고 직접 재배하는 듯한 큰 통에서 뽑아 주셔서 아주 싱싱했었던 기억이다.

참기름 심부름을 갈때는 코가 호강을 하였다. 참기름 집에 들어서면 가게 안은 온통 고소한 참기름 내음으로 가득하였고, 입구 왼편에서는 깨가 볶는기계 속에서 맛있는 소리를 내며 볶아지고 있었다.


명절에 떡집 방앗간 줄은 항상 길었다.

아마도 우리집 떡 기다림의 반은 내가 섰었던 둣 하다. 요즘 시절이면 떡집에 미리 주문을 하거나, 만약 기다려야 한다면 셀폰으로 게임을 하며 무료함을 달랬겠지만, 당시는 어른들 사이에 서서 그냥 우리 차례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언니 오빠와 장난을 치기도 했었지만, 흰 김 사이에서 산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던 갓 쪄낸 시루떡이나 기계에서 줄줄 나와 찬물로 다이빙을 하던 가래떡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척들이 모이는게 즐거워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점점 그 모든것들이 귀찮고 무료해지기 시작하였다.

언제나 나는 심부름만 하였고, 콩나물을 다듬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만 하는데, 오빠는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6살 많은 언니는 공부하러 가느라 집에 없거나, 혹은 따뜻한 방에 앉아 전을 부치는 일을 주로 도왔다.  

당시는 어려서 ‘고상’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내 눈에는 언니가 어른들 틈에서 전 부치는 일이 고상해 보였다. 어른들과 전을 부치는 계급.  어른들 대화에 끼어 이야기하는, 그들에게 더 가까운 레벨. 어느 순간부터 언니가 부러웠다.

초등학생인 나는 위험해서 전을 부치는 일을 주지 않았다. 실로 달걀프라이를 처음 해본 날, 기름이 튀어 손목을 데인적이 있었다. 10-11살 정도였는데, 상처가 좀 컸었기에 기억이 난다. 칼로 써는 일도 내 몫은 아니었다.


집안의 막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허드렛 일을 돕는 일 뿐이었다.

혼자 파나 콩나물 다듬는 일이 무료하고 재미 없어졌다. 그래서 콩나물을 다 다듬고 나면 남은 잔여물을 손으로 장난쳤다. 주무르고 으깨고.

지금의 내 막내딸 처럼 말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차피 질리도록 해야하는 가사일.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굳이 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먼저 돕겠다고 다가오면 조금씩 가사일을 시켜준다. 특히 막내는 사랑하는 엄마가 하는 일이기에 모든 집안일이 즐거워보이고, 먼저 하고싶어 안달이다.

 

미국에서, 가까운 곳에 가족, 친지없이 소가족으로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안타까운 일 중 하나가 그거다. 어린시절 내가 겪었던 집안의 큰 이벤트들이 없다는거.

나는 자연스레 대가족 모임의 반가움과 행복함을 즐겼고, 물론 반대로 피곤함도 겪었다. 매년 행하던 그런 집안 행사를 통해 한국 전통과 우리 집안 문화를 배웠고, 어떠한 댓가없이 마당을 청소하고 심부름을 하며 가족을 위해 기여하는 내 모습이 즐거웠다. 그리고 언니를 보며 질투라는 부정적 감정도 알게되었다.


하교 후 우리집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메주콩 냄새나 칼칼한 김장냄새를 맡고, 책가방을 방에 던져놓고 달려나가 그 맛을 보는 재미...  

다양한 친척들 속에서 사람 관계와 예의를 배우고, 그 속에서 겪을 수 있는 긍정적, 부정적 경험들이나 추억을, 나는 내 아이들에게 줄 수가 없다.


갓 삶은 뜨끈뜨끈한 메주콩을 빻을때 곁에 앉아 찍어먹는 맛은 정말 고소했다.

작은 담벼락처럼 쌓인 햇배추로 갓 만든 김장김치를 한가닥 찢어서 입에 넣으면, (어린 내게는 비록 매웠지만) 싱싱한 샐러드처럼 와삭한 식감에, 달달한 배추, 그리고 엄마 김치 양념이 어우러진 그 맛에 밥 두공기를 뚝딱 먹어치웠다.

제사 전에 손을 대면 안되는 제사 음식인데, 엄마가 잘 못 구웠네? 라며 건네주던 따뜻한 고구마전도 맛있었다.

동짓날 팥죽에 내가 만든 세알이라며 서로 찾던 재미와 달콤한 팥죽 맛은 마치 디저트 같았다.

정월 대보름 오곡밥도 고소했고, 나물들은 어린 내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신기하게 요즘 정월 대보름이 되면 나물이 땡긴다.


현시대 한국에 사는 많은 가정들도 나와 비슷할 거 같다.

이제는 대부분 아파트에 살기에, 각 집마당에서 노란 메주콩을 삶아 직접 빻아 뭉쳐 메주를 만들고, 그것으로 된장이나 고추장을 만들지 않을거다.

큰 쇠절구에 종일 콩을 빻다간 층간소음으로 신고가 들어오지 않을까 싶다.

절인 배추를 탈수기에 짜야만 할 만큼, 많은 배추를 쌓아놓고 김장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을 듯 하다.

마켓이나 온라인 주문으로 사계절 언제나 김치, 된장, 고추장을 구입 할 수 있는 시절이라 계절마다 저장 음식을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다.

엄마들 또한 바빠서 그런 집안 행사를 주도할 시간적, 체력적 여유도 부족하다.


가끔 아이들과 함께 간단한 머핀이나 바나나빵을 만든다. 그 반죽을 할때 막내딸은 계속 찍어 먹는다.

생밀가루 반죽이라 나중에 배가 아플 수 있다고 말려도 딸은 맛있다고 스파츌라를 빨아 먹는다.

그럴때면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웃으며 그냥 둔다.

나 또한 요리하는 엄마곁에서 손가락으로 찍어서 쪽쪽 빨아먹지 않았던가.

아이들의 경험과 추억을 위해 나도 가족 전통 이벤트를 구상해 보고 싶었지만, 항상 체력의 한계에 부딪힌다.  대가족이 있어서 가능했었나보다.


이렇게 콩나물을 함께 다듬으며 대화를 하고, 그 다듬은 콩나물로 따뜻한 국을 끓여 가족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막내딸은 재미와 함께 스스로 얼마나 뿌듯해할지,,

또한 한국 티비를 보며 엄마와 함께 알콩달콩 콩나물을 다듬던 추억이 내 아날로그 감성을 머금은 80년대 추억처럼, 아이에게도 지금 모든 경험이 좋은 비료가 되어 그 인생이 풍성해 지길 바래본다.

 

이제 콩나물을 보면 제사, 명절뿐만이 아니라, 귀여운 내 8살 막내딸이 떠오를거 같다.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 나름 집중한 표정으로 콩나물을 다듬던 모습이.


quick sketch by Beverly_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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