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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Apr 07. 2021

자궁엔 물혹, 나는 불혹




 내 몸은 올해로 마흔 살이 되었다. 자궁의 나이도 덩달아 마흔 살이 되었고, 아마 난소의 나이는 그보다 많다고 의사는 말할 것이다. 


 나는 또래에 비해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꽤 오랫동안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왔고, 비흡연자에 아주 가끔 소량의 음주를 한다. 식습관도 균형이 잡혀있고, 대체적으로 알려진 몸에 해롭다 하는 것들을 멀리하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내가 아프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갸우뚱하게 되고 의사들은 영역 밖의 일을 대하듯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주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있죠. 흔히들 말하는 체질이죠. 이건 타고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라고 말하면서.


 아픈 건 일종의 사고다. 대비하거나 예측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도 준비를 벗어난 사고는 여전히 일어나기도 한다. 





 십대의 어느 나날들, 막연히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예뻐지겠지. 화장도 하고 이 지긋지긋한 귀밑 3센티 단발도 벗어날 거니까. 대학생이 되면, 아니 직업을 갖게 되면 돈도 벌 테니까 예쁜 옷도 많이 입을 수 있을 거야. 한 달에 한 번씩 죽을 것 같은 생리통도 없어질 거고, 이마에 자잘하게 난 뾰루지 같은 건 아예 사라지겠지. 아마 탐폰을 쓰게 될 지도 모르지. 어른은 그런 것쯤은 어렵지 않게 하겠지.


 반 정도는 맞고 반 정도는 틀린 이십 대를 보냈다. 확실히 안경대신 렌즈를 끼고 어설프게나마 화장을 시작했고 머리를 길렀으니 상상하던 외형과 대략 비슷해지긴 했으니까. 생리통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사춘기 호르몬으로 이마에 오돌도돌 돋던 좁쌀 여드름은 생리 때마다 턱에 음흉하게 등장하는 지름 1센티 짜리 헤비급 염증성 여드름으로 바뀌었다. 탐폰은 대차게 실패했다. 


 조금은 아차 싶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실망의 쓴 맛을 덜 본 나는 이어 다가올 삼십 대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멈추지 않았다.


- 지금은 어설퍼도 삼십대가 되면 내 스타일이라는 게 자리 잡겠지. 지금보다 훨씬 더 돈을 많이 벌 텐데 옷도 좋은 옷, 화장품도 백화점 화장품만 쓰겠지. 잡지에서 보면 다들 그러니까. 어쩌면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을지도 몰라. 어른들 말로는 아기 낳고 나면 생리통이 없어진다고 하잖아. 그리고 그 나이엔 노화가 서서히 시작된다는데 설마 생리라고 턱에 왕뾰루지가 나고 그러겠어? 


 또 반 정도밖에 맞추지 못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아기가 생기지도 않았고, 돈을 번다고 해서 백화점에서 쇼핑을 마음껏 하는 건 아니었다. 노화가 시작되며 자궁은 자잘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 자그마한 장기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까지 나를 밀어 넣었다.






 또다시 앞자리 수가 바뀌는 시기를 목전에 둔 나는 사십 대에 대한 상상을 그만두었다. 일어날 일들은 일어날 것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때론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모든 게 흘러가기도 하고, 때로는 고심하며 예측해 본 몇 개의 나쁜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안 좋은 일이 툭 하고 흘러나올 것이다.


 무력감이라 칭하기에는 확실히 주저앉아버린 것은 아니니, ‘내려놓음’ 정도로 해두기로 한다. 나보다 몇 해를 먼저 경험한 주변의 사람들이 비슷한 상태인 걸로 봐서는 시기적으로 찾아오는 보편적 깨달음에 틀림없다. 


 불혹. 세상일에 정신을 뺏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는 나이.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요즘 ㅇㅇ살은 옛날 ㅇㅇ살이 아니야.’라는 말이 전 연령에 해당되어버린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나이를 뜻하는 옛 한자어가 아직 변하지 않고 미묘하게 그때쯤으로 맞아 들어가는 걸 보면 놀랍다. 


 정신을 뺏길만한 세상일은 조금씩 혀에 대 본 나이다. 달콤해도 자주 맛볼 수 없는 것과 쓰기만 해도 꼭 삼켜야 하는 게 공존한다는 걸 적당히 알게 되었다. 마음을 내려놓아야만 갈팡질팡할 일도, 판단을 흐리는 일도 적어진다. 


 살아가는 것의 많은 부분이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장 가깝게는 내 몸뚱이 하나마저 그렇다. 살아온 날들의 반 이상은 내 몸뚱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각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을 떠도는 수많은 몸을 위한 방법들이 매번 그럴싸한 결과만 내놓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 시간 동안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결코 내가 이 부분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픈 건 일종의 사고다. 그러니 이렇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내 탓으로 돌려 자책할 필요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인을 찾는 마음의 수고로움까지도 내려놓을 차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내려놓은 그 다음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면. 천천히 되짚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놓치고 지나간 순간들마저 보듬다보면 무엇을 내려놓아야 현재에 집중할 수 있을지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단발머리 시절의 고민도, 긴생머리 시절의 고민도 뭐 하나 시원스레 풀어내지 못한 채지만.


 그래서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도 비슷한 순간이 있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몸속 작은 물혹 하나에서 시작된 소소한 이야기가 ‘불혹’이라는 멋진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란 희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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