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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Apr 07. 2021

나도 네 나이 땐 그랬어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들르는 한의원이 있다. 원인 불명의 난치성 피부질환으로 1년간 대학병원에서 스테로이드를 처방받아 먹고 바르고 하는 것에 지쳐 있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간 난치성 피부질환 전문 한의원이었다. 3개월 동안 침을 맞고 한약을 복용하는 동안 처음으로 상태가 호전되었고, 6개월 후에는 말끔히 사라졌다. 한의학이라는 게 증상 하나로 그 부분만을 고치는 방식의 학문은 아니기 때문에, 그때 맺은 인연 이후로 나는 내 몸의 각종 이상 증상 –언제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생리통이라든지, 소화 장애라든지, 관절 통증, 간혹 발생하는 지루성 두피염 까지도- 들을 가서 상담하곤 했다. 


 사실 대부분의 증상은 면역의 문제였고, 그로 인한 염증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친절하신 선생님은 항상 시간을 들여 자세히 설명해주셨지만 ‘그럼 이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건가요?’ 같은 나의 절망적인 질문에 어느 날 이런 대답을 해주셨다.


- 어떤 면에선 안타깝지만 타고났다고 봐야죠. 체질이 그런 거니까요. 관절이 약하게 타고 났다기보다도 약해지기 쉬운 기질을 타고 난거죠. 염증을 타고 났다기보다도 면역력이 약해질 때 염증으로 발현되기 쉬운 기질을 타고 난 거구요. 그렇지만 너무 엄마아빠를 원망하지는 마세요. 제가 부모가 되어보니까 의도치 않게 물려준 부분들이 마음이 참 아프더라고요.


 ‘그럼 다 부모님 탓이네요?’ 라고 받아치려 준비하고 있었던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나는 엄마에게 한 번도 반말을 쓴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 엄마에게 친구 집에서 놀고 가겠다는 전화를 했을 때, ‘너 엄마한테 존댓말 써??’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던 친구가 생각난다.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엄마들처럼 ‘내 새끼, 우리 강아지, 우리 공주님’ 하며 우쭈쭈 키우지 않은 엄마 때문인지,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아이들처럼 ‘우리 엄마 최고, 엄마가 제일 좋아’ 하며 제어 불가능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성격의 나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리 모녀는 말하자면 살갑지는 않은 관계다. 


 부모 자식 간에 주어진 사랑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굳이 서로 표현하거나 한 몸 같은 거리감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은 이게 서로 마음이 편하다는 걸 분명히 안다. 하지만 어릴 때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항상 따라 붙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끼던 필기구가 잔뜩 들어있는 필통을 잃어버려 눈물을 흘리는 친구를 대신해 가져간 누군가를 대차게 욕해주는 친구 엄마를 볼 때 그랬다. 열 감기가 심해 조퇴를 하겠다는 친구를 데리러 걱정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교실 앞까지 데리러 오신 친구 엄마를 볼 때 그랬다. 나의 엄마는 지갑을 잃어버려 울상이 되었을 땐 ‘그러게 왜 그걸 책가방 앞주머니에 넣어?’라고 말하고, 아파서 학교에 못 가게 되었을 땐 ‘너 진짜 안 갈 거야?’ 몇 번이고 묻는 그런 엄마였다. 


 아마도 생리통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병원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건, 미성년자가 산부인과 진료를 받는 것이 익숙지 않았던 시대 탓도 있었겠으나 늘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엄마와 나 사이의 거리감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생리통에 대해 얘기한 적은 있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학교에서 제대로 수업을 들을 수가 없으며, 양 또한 그 자그마한 생리대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게 너무나 이상하다고. 생리하는 8일 중 4일 정도가 그렇게 한 시간에 한 번씩 대형 생리대를 갈아치울 정도로 피가 나오는 걸 보면 내 자궁이 거대한 거냐고. 때로는 찹쌀떡만한 검은 핏덩어리가 쏟아져 나오고 때로는 죽은피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빠알간 선혈이 나오는 게 정상이 맞느냐고. 


 엄마의 답변은 항상 같았다.


- 나도 네 나이 땐 그랬어.


 그 한 마디는 더 이상 생리에 관련한 아무런 징징거림도 용납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아프다한들 엄마도 그랬다고 하면 별 수 없다. 양이 많아 잘 때는 유아용 기저귀를 착용해야 한들 엄마도 그랬다고 하면 별 수 없다. 말하자면 엄마라는 존재는 ‘누구나’의 대표주자이고, 때문에 엄마가 겪어본 일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며 비정상은 아니라는 거다.


 ‘생리통은 정상’이라는 생각은 환자가 의사의 진료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자궁내막증과 같은 병의 진단을 받는 것을 방해한다고 한다. 극심한 생리통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인 자궁내막증을 앓는 많은 여성이 엄마에게 증상을 이야기하면 그들도 비슷한 일을 겪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집안 내력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통증이 시작되고 진단받기까지 평균 10~12년이 걸리며 환자의 60%가량은 20세 이전에 자궁내막증으로 인한 통증이 시작된다고 하는 걸 보면,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 엄마의 특수성 때문도 아닌 게 확실하다. (*참조 :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 마야 뒤센베리)


 그러니까 유전적으로 엄마의 질병을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다 보니, 아픔을 토로했을 때 대부분 나의 엄마에게서처럼 ‘나도 그랬어’ 라는 답변을 들으며 ‘별 수 없군’ 하고 자라왔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 시대도 그랬다. 사춘기 딸을 데리고 산부인과에 찾아간다는 것은 시선을 받는 일임에 틀림없었을 테니까. 병원의 문을 여는 순간 병에 대한 가능성보다, 그것만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에 호기심을 품은 눈을 마주해야 했을 테니까. 별 수 없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정상이라 생각하며 묻어둔 통증은 긴 세월동안 원인과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끝도 없는 여정으로 이어졌다. 유전을 원망하기에는 물려받은 것들 중 감사하고 싶은 좋은 점들도 있기에 나는 무조건 엄마 탓도 아빠 탓도 할 수 없다. 그런 투정을 부리기엔 이미 나도 멋쩍을 만큼 나이가 많아졌다. 


 그래서 대신 조금의 다짐을 하기로 했다. 만약 나에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매번 과거의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나를 투영해 편협한 답을 내밀지 않기로. 내 사랑의 방식이 원래 타고난 아이의 사랑의 방식을 억지스럽게 바꿔가고 있는 게 아닌지 가끔은 확인하기로. 내 뱃속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아이와의 거리를 언제나 0으로 정해두지 않기로. 그리고 귀를 기울일 것. 아이가 아무리 세세히 말한다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닐 테니까. 때로는 정말 필요로 하는 게 뭔지 몰라 긴가민가한 것들만 잔뜩 늘어놓고 있을지 모르니까.


 나의 엄마도 비슷한 고민과 다짐을 했으리라 추측해본다. 끝없는 원을 따라 걷는 걸 멈출 수 없으니 가끔씩 저 앞 멀리도 내다보고 뒤도 돌아보면서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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