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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Apr 07. 2021

아기 낳고 나면 나아져요




 지금까지 거쳐 간 산부인과를 손꼽아보니 총 일곱 군데다. 난임 전문 병원과 대학 병원을 포함시키지 않은 개수다. 난임 병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리통으로 문을 두드렸다. 


 27살에 난생 처음 방문한 산부인과는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낸 곳이었다. 번화가 중심의 큰 빌딩에 있었고, 서울 각 지역에 지점이 많았고, 병원 당 의사 수도 어마어마했다. 은행보다 더 넓은 대기실을 빼곡하게 채운 여자들 사이에 순번표를 들고 한 시간 대기한 후, 초음파 검사도 없이 피임약을 처방받았다. 내 첫 산부인과 의사를 붙들고 끔찍한 생리통과 그 때문에 복용해온 피임약에 대해 오랜 시간 얘기를 늘어놓은 진의는 ‘전 제 생리통의 원인을 알고 싶고 치료가 가능한지도 알고 싶어요.’였으나, 전달 방식의 문제였는지 워낙 긴 서사를 늘어놓은 탓에 핵심을 비껴갔는지 새로운 피임약만 처방받은 것이다. 맥 빠진 채로 처방전을 들고 나와서 다시 한참을 고민했던 것 같다. 생리통을 해결하려면 대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건지.


 다음 번 피임약을 처방받으러 그 산부인과를 다시 방문했고, 똑같이 순번표를 들고 한 시간 대기 했다. 맘먹은 대로 당차게 초음파 검사를 받아보고 싶다는 내 말에 의사는 물었다.


- 한 번도 초음파 검사 받아보신 적 없으세요?


그렇다는 내 대답이 떨어짐과 함께 의사는 딸깍 빨간 볼펜을 누르더니 작은 브로슈어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 그러시면 저희 병원 패키지로 나온 검진 중 하나를 받아보시는 게 좋아요. 성 경험 있다고 하셨으니까 B패키지로 가요. 자궁경부암 검사와 기본적인 성병 검사가 포함되어 있고....


 아마 나는 다시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뜻도 모를 검사들이 가득 적힌 브로슈어를 의사가 볼펜으로 짚어주는 대로 들여다보면서 끄덕끄덕만 했다. 그날 익숙하지 않은 의자에 기대 익숙하지 않은 자세에서 본 첫 초음파에서는 ‘자궁은 깨끗하다’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고, 피를 뽑고 종이컵에 소변을 조금 담아 건네고 온 일주일 뒤, 질염이 있으니 약 처방을 받으러 내원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병원을 나올 때 처음엔 눈치 채지 못했던 배너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음순 성형’, ‘질 타이트닝’. 왠지 나는 이 곳에서는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또 생리통의 원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마치 그건 의사들끼리 절대 환자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일급비밀로 지정해 놓고, 알아내려는 사람들에게 엉뚱한 것들을 보여주며 현혹하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나는 새로운 산부인과를 찾아가 비밀을 캐내고자 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어색하기만 하던 진료의자도 꽤나 익숙해졌고, ‘깨끗’하다던 자궁은 갈 때마다 근종이니 물혹이니, 안에 군식구를 들이는 모양이었다. 


 생리통의 원인에 대한 의견도 병원만큼 다양했다. 근종 때문이라는 의사도 있었고 (그럼 왜 자궁이 깨끗할 때에도 아팠는지?) 호르몬 영향으로 자궁이 과하게 수축을 하기 때문이라는 의사도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공통적으로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있었다.


- 아기 낳고 나면 나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출산은 하실 거죠?


 이 얘기는 기혼이 되고 나서만 들은 게 아니라 미혼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막연히 짜증이 났던 건, 같은 얘기를 엄마 또래의 여성들로부터 숱하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애 낳고 나면 생리통 없어져. 한 번 애를 낳고 나야 자궁이 깨끗해지는 거야. 이래서야 의사가 무슨 차별성이 있는 건지?



 지금은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실제로 출산과 함께 근종이 사라지기도 하고, 호르몬이 안정되면서 있던 생리통이 없어지기도 한다. 다만 끊임없이 나에게 의문을 남긴 부분은, 왜 의사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는 출산 같은 소극적인 이벤트에 기대어 적극적인 치료 방법 같은 건 하나도 제시해 주지 않느냐는 거였다. 그 답답함을 안고 매번 다른 산부인과를 찾아갔고, 일곱 번째 산부인과에 이르러서야 나는 ‘자궁내막증’과 ‘자궁선근증’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 자궁내막증이나 선근증 때문일 수 있어요. 내막증이라는 게 초음파로 진단되는 건 아니고 복강경을 진행해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긴 한데 말씀하신 증상들로는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어요.


 산부인과를 들락거린지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그런 가능성을 듣는다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병원에서도 마땅히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 병원이나 여성 전문 대형 병원을 제외하고는 출산 경험이 없는 환자를 대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은 무척이나 소극적이다. 물론 초음파나 다른 검사에서 심각한 상태의 무언가를 발견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원인은 바로 딱 ‘이것’입니다 라고 할 수 없는 다양한 증상들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치료했을 때 낮아지는 임신 확률, 출산의 어려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내가 원했던 건 임신과 출산을 제쳐놓고 통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들엔 무엇이 있으며, 치료 과정은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먼저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부작용으로 임신 성공 확률이 낮아질 수 있다는 건 그 다음에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내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는 알았을 테니까. 매번 선택지가 없는 빈 답안지를 받아들며 느꼈던 건, 임신과 출산을 원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대한 배려라는 느낌보다 당장 아파 죽더라도 이겨내고 너는 언젠가 꼭 임신을 이뤄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많은 병원에서 나를 위한 선택지가 적힌 답안을 받지 못했던 나는 결국 누구의 조언도 없이 어느 날 문득 대학병원에 가야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는 않는다. 동네의 작은 산부인과에서도 해결방안을 함께 고민해주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운이 나빴을 뿐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내가 그런 병원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어리석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음순 성형’을 전면에 내건 산부인과를 첫 병원으로 선택한 나라니, 말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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