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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 Jun 12. 2019

빗속의 드라이브를 사랑하는 이유

밤을 달려 어디든

   아주 어릴 적 읽었던 어린이 글짓기 교재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삶의 다른 많은 규칙? 들과 함께 나를 내리눌렀던 그것은 바로 '내가'라는 말을 가급적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기 형식이나 에세이 형식은 이미 글을 쓰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내가'라는 말을 쓸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의미였다. '문과' 체질이라는 건 나도 알고 세상도 알았지만 어쩌다 보니 등 떠밀려 '이과'를 선택하고 공대로 진학하다 보니 수능형 '작문', 시험 합격용 '논술'의 글짓기가 글쓰기 배움의 전부였다. 대학교 와서도 교양 수업에서 배우는 글쓰기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공대생이 대부분인 교양 수업에서 전공자 수준의 깊이를 기대하기에는 교수님도, 우리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 규칙들은 대부분 잊히고 몇 가지만 남아 신경 쓰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나는'으로 시작되는 문장들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그럼 과연 '나는'이란 말을 쓰지 않았을까? 전혀 아니다. 하지 말라면 꼭 더 탐나듯이 나는 많은 문장에 '나'를 넣는다. 글쓰기의 규칙 이전에 글도 결국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대화인데 난 예의 바른 사람이니까 항상 주어를 밝혀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문장에 '나'를 넣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혼동할 수도 있으니까. 의사소통의 기본은 '나를' 분명히 밝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으며 오늘도 '나는'이라는 말로 시작해본다.


   '나는' 운전을 좋아하지 않았다. 운전면허를 회사 입사 직전에 따다 보니 이렇다 할 훈련을 하기 전에 연수원에 들어갔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부서에 배치받고 이런저런 바쁜 날들을 보내다 보니 운전대를 잡을 일이 없었다. 뭐든 감이 있을 때 계속해야 실력도 늘어나는데 면허를 따고 다시 운전대를 잡기까지 거의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리다 보니 흔히 말하는 장롱면허로 전락해버렸다. 6개월이 걸려 잡은 운전대는 회사차로 같은 부서 과장을 태우고 외근을 나가는 길이었는데 운전을 맡기고 사색에 빠지려던(낮잠을 자려던) 과장은 그날 하루 종일 운전을 해야 했다. 그때 내 운전실력을 증명하는 에피소드다. 그걸 극복하는 과정은 나중에 다른 글에서 쓰기로 하고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 드라이브의 매력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지루하지 않도록 짤막하게!

  

   며칠 전의 밤처럼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에 드라이브를 하면 뭔가 아늑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차창 밖에는 마치 양동이로 물을 붓듯이 비가 쏟아지고 있고 그것을 차 안에 앉아 바라보고 있자면 공간이 단절된 듯, 연결된 듯 묘하게 정적이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타닥타닥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달리고 있다 보면 계기판 불만 반짝이는 운전석 작은 공간이 나만의 완벽한 우주처럼 느껴져서 세상 많은 고민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살면서 마주하는 많은 것들도 결국 거리감이 중요한데 비가 오는 날에 드라이브를 하고 있으면 고민에도 거리를 둘 수 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생의 '비기'와 같아서 나를, 내가 처한 상황을, 사로잡혀 있는 고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 주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그 판단이 늘 내가 원하는 결과로 귀결되진 않고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 결정조차 없었으면 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는 족집게 과외 선생님처럼 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연애에서는 정신 못 차리는 경우가 많다. 현명한 사람들도 자신의 일에 힘겨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 같다. 우선 거리를 두지 못했기 때문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연애사는 당연히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껏 분석 및 해결책 제시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내 영역으로 들어오면 주저하게 된다. 이럴 때 빗속을 달리면 내가 가진 고민에 대해 거리를 두며 생각할 여지가 생기고 어떤 결과가 오든 '그래 일단 가보자'라는 마음도 가질 수 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빗속을 달리다 보면 인생도 일단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도와주는 것이다.


   비가 오는 날에 어디든 마음먹었을 때 우산 없이도 떠날 수 있다는 자유로움은 차가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나중에 다른 글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장롱면허를 스스로 극복했던 것에는 그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도 컸다. 난 달리고 싶었다. 물론, 비가 오는 날이면 차선도 안 보이고(규정은 밤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보여야 한다는데 그런 차선은 거의 보지 못했다.) 운전 자체는 더 신중하게 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신중함이 다른 생각을 잠시 안 하게 해 주니 좋은 셈이다. 고민에 거리를 둘 여유도 없고 어떤 결정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상황이라고 해도 좋다. 빗속을 달리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 그렇게 잠시나마 잊는 것만으로도 고민이 주는 숨 막히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운전에도 집중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라면 절대 운전대를 잡지 말아야겠지만 오래 사로잡혀 있다고 해결되는 고민은 없다. 다리에 쥐가 나면 근육을 조금씩 스트레칭하며 풀어주듯이 마음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 상황에 따라 그냥 그 고민에 계속 노출되는 게 더 좋을 때도 있지만 헤어 나올 시기고 오래 끌어안고 있으면 안 되는 고민이라면 운전이든 뭐든 도움이 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생각해보니 비가 오는 날의 운전은 또 하나의 혜택이 있다. 귀찮아서 미뤘던 세차도 자동으로 해주니 뭐든 나쁜 것만은 없다고 믿어본다. 살다 보면 괜히 마음의 여유가 없어 자동세차 한번 들를 시간이 없을 때도 있는데 비가 내리면(물론, 마르면 얼룩이 남기도 하지만) 뭔가 씻겨 내려가는듯한 개운함이 있다. 삶에 비 내리는 날이 있어도 그게 다른 면에서는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줄 거라고 믿어보면 어떨까? 아니 믿어야 한다. 뭐가 됐든 계속 가야 하니까. 그리고 그런 날에 빗속을, 밤을, 거리를, 어디든 달리고 있으면 내가 갖고 있던 고민들을 등 뒤로 조금씩 던져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릴 때 나를 사로잡았던 고민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생각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하는 고민 어떤 것도 사소하다 쉽게 말할 수 없겠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 인생에 결정적인 갈림길이 되진 않는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이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시동을 켜고 달린다. 가벼운 고민은 달리면서 공중에 띄워 날려버리기 위해서.  


   규정 속도, 신호 꼭 지키시고 안전 운전하세요. 안전 운전이란 결국 서로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지켜야 다른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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