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러블리 Jun 10. 2019

자동차 에어컨 필터를 갈아 끼우며

당신에게 시간의 가치는?


   조금 더 아름다운 말을 써보겠다고 구입한 종이 국어사전은 먼지만 쌓여간다. 종이 책을 사랑해서 단 한 번도 '이북'으로 뭔가를 읽어보지 않은 내가 사전은 인터넷 사전을 애용하고 종이 사전은 존재조차 잊고 살고 있으니 그것도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종이로 된 서적만을 고집한다는 '장인 정신' 같은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편의성이라는 것도 주관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보다. 그런 생각들로 겸연쩍어하며 오랜만에 종이 사전을 펼쳐 단어 ‘숙달’을 찾아보니 ‘익숙하고 통달함’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익숙하고 통달함'이라...

3분의 2만 열린다..

   그럼 과연 익숙하고 통달한 지정 정비소 정비사님들에게는 이 에어컨 필터  교체가 수월할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주말을 맞아 몇 달 전에 구입해놓은 에어컨 필터를 직접 교체하며 '숙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숙달과 미숙의 차이가 이 난해한 작업이 얼마나 쉽거나 혹은 어렵게 다가오게 하는 건지 궁금하다. 차를 구입하고 처음 정비를 맡겼을 때도 담당 정비사님이 애를 먹었던걸 보면 그냥 애당초 설계 미스라고 봐야 하는 건가? 정비사님은 마음먹은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때 짓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한참을 조수석에서 나오지 못했었다. 자동차 동호회 카페에 가도 자가 교체하는 모든 사람들이 짜증을 호소하는 걸 보면 오히려 이게 정상 기준의 조립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같은 모델 모든 차의 에어컨 필터 교체가 불편하게 만들어졌다면 그건 불편함 이전에 차량 제작사의 정해진 기준에 맞춘 거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거창하게 생각해보면 선과 악의 기준도 시대의 요구사항에 따라 바뀌듯이 정상, 비정상도 그런 기준에서 결정될 것이고 사용자를 힘들게 하는 이 조립성도 회사 입장에서 보면 정상인 것이다. 같은 상태를 두고 서로 의견이 다르면 지금처럼 누군가는(더운 여름 주차장에서 낑낑 거리며 작업하는 나 같은,,) 열불 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겠지.


   에어컨 필터가 노출되는 단계까지 작업했다면 그저 서랍처럼 밀어 넣으면 되는 대부분의 다른 차들과 달리 이 녀석은 낑낑 거리며 조심조심 작업해야 한다. 투입구 뚜껑? 이 열리는 각도가 전면 프레임에 일부 막혀있는 구조다 보니 90도로 열릴 수가 없어서 자동차 동호회 카페에 보면 플라스틱 고정핀을 부러뜨린 사람이 꽤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비소에 가면 이 에어컨 교체 하나에 5만 원 가까이 청구되니 자가 교체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해보면 꽤 괜찮은 필터를 구하면 2만 원 중반은 줘야 하니 사람들은 정비소에 지불해야 할 5만 원 중 2만 5천 원에 해당되는 비용이 자신의 노동 값? 보다 비싸다고 판단하는 셈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휴식 시간 10분을 여기에 투자하는 게 2만 5천 원을 넘어서는 손해라고 생각해서 그냥 정비소에 맡기기도 한다. 나는 얼마 전까지 후자였지만 이번에는 직접 교체해보기로 했다. 귀찮지만 '뭐 얼마나 어렵겠어? 10분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1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고 주의할 것도 많은 작업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산다는 개념이 매우 주관적인 기준하에 이루어지는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시간의 값은 사람마다 다르다. 같은 10분도 누군가에게는 100만 원의 가치만큼 아깝게 느껴지고 누군가에게는 2만 5천 원의 가치만큼 감내할 수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자신이 판단하는 10분의 가치가 높을수록 사람들은 그 시간을 더 값어치 받는 일로 채우고 싶어 하고 그 외의 일은 시간을 사서 맡기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사서 내 시간을 아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10분을 100만 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만큼 나는 좋은 거래를 한 것이다. 차량 정비소에 가서 5만 원을 주고 다른 사람이 갈아주는 것을 선택한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에어컨 필터 교체하는 것에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더 가치 있으며 5만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동차 와이퍼 가는 것도 정비소에 가서 해결하는 사람은 와이퍼를 사기 위해 차량용품점을 가고 교체하는 방법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직접 교체하는 시간이 전혀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시간을 다른 시간에 쓰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각자가 가진 시간의 가치는 이토록 다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해하는 것은 각자가 가진 시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 즉, 관계는 늘 어려운 건가? 손목에 찬 시계에서 흐르는 초침, 분침의 간격은 너무나도 동일한데 그 같은 간격의 가치를 이해하는 건 각자마다 너무 다르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내어줄 수 있는, 공유할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다를 것이다. 이걸 머리로 이해하면 오해할 일도 서운할 일도 없을 텐데 선뜻 그걸 마음으로 이해하기란 늘 어렵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모르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장하게 되므로 인간적이라 함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한 상태가 아니고 이해해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이 더운 여름 지하 주차장에서 쭈그리고 낑낑거린 시간도 화나 날 일이 아니고 하나의 경험이며 배움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내 눈에는 그저 조립이 잘못된 걸로 보일지 몰라도 기계공학적으로는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 일부러 이렇게 조립된 것일 수도 있다. 내 기준으로만 판단하면 안 될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세상이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무조건 욕하고 탓하면 배움 없이 거기서 멈출 뿐이다. 그렇게 이해하려고 해 본다.


   음... 다음 에어컨 필터 교체는 정비소에 맡길지 직접 할지 생각을 해봐야겠다. 그때 나의 10분은 어떤 가치로 느껴질지 궁금하다.  

작가의 이전글 연회비를 자동 이체하면 마음을 드립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