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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 May 31. 2019

아버지, 소중했던 당신을 기억하며

   항상 남겨진 사람은 그 남겨지던 순간을 어떤 형태로든 평생 안고 가게 됩니다. 무엇에 의해 남겨지던, 그 순간은 남은 인생에 어떻게든 그림자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매년 11월 1일 오후 6시 25분 언저리에는 아버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가끔씩 글을 남기는 개인 블로그에 마치 숙제처럼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적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추모의 방법은 그런 형태였던 셈입니다. 바쁘고 정신이 없으면 잊어버릴 만도 한데 매년 11월이 다가오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날들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대한 무의식적 방어 기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저에게 참 복잡했습니다. 전형적인 무뚝뚝한 옛날 남자셨고 형에게는 꽤 엄하셨던 기억이 많은데 늦둥이인 저에게는 하염없이 너그러우셨습니다. 그렇다고 막 살갑고 가정적인 남자는 또 아니셨죠. 사실 많은 추억이 없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떠올려봤는데 성인이 되고 아니, 학창 시절에도 함께 찍은 사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산 시간이 29년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던 시절을 빼면 대충 23년 정도고 군대로 떠나 있던 시간과 회사 연수를 받고 뭐하고 집을 비웠던 시간을 3년 정도 빼면 다시 20년 정도가 오로지 아버지와 보낸 시간입니다. 거기서 야간 자율학습이라는 반강제 감금이 3년간 이어졌던 고등학생 시절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잘게요.'가 대화의 전부였던 시기를 생각하면 아버지와 오로지 마주 보고 산 시절은 17년이 됩니다. 생각하면 저는 보통 사람들보다 아버지와 지낸 시간이 짧은 셈입니다.


   늦둥이가 되다 보니 제가 나이가 들었을 때 이미 아버지는 은퇴를 하시는 시점이었고 몸도 아프시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에게 직업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나이가 들어가셨고 힘이 빠진 모습으로 앉아계시곤 했습니다. 거실에 앉아서 TV를 보시고 신문을 보시고 산에 다녀오시고… 건강이 나빠지면서는 그것도 항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아버지를 강하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형제 많은 집안의 큰집 장남으로 아버지가 짊어진 짐이 너무 과중해 보였고 어린 저에게 그것은 아버지의 강함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조용하신 분이었고 어디 가서 큰소리로 싸우거나 무엇을 쟁취하는 성격은 아니셨습니다. 회사에서도 은퇴하실 때까지 조용하게 보내셨고 누구를 욕하거나 찍어 내리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저는 답답해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난 아버지처럼 약하게 우유부단하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악착같이 살아온 원동력의 한 부분은 ‘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 일지도 모릅니다. 노쇠한 아버지는 저에게 어느 순간부터 늘 나약한 모습으로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제가 대리 직급이 되었고 내년이면 과장 직급으로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회사는 직급 호칭이 없어지고 ‘프로’ 호칭으로 통일했지만 여기서는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적어보았습니다.) 돌아보면 불과 몇 년인데 50년을 다닌 느낌이 들 정도로 하루하루가 전쟁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뒤통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얼얼하고 몸과 정신은 회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회사 바깥의 일로도 시너지 효과를 내며 뒷목이 뻣뻣할 때도 있습니다. 짧은 희로애락이 모두 이 사무실에 있는 것 같고 사람 관계가 참 무서운 것이며 새삼 회사란 비정한 곳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가끔은 진지하게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돌아보게도 됩니다. 쉽지 않지요. 어떤 하루도 같지 않습니다.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의 반복은 늘 동일하지만 그것의 세부적인 모습은 그 어떤 하루도 똑같지 않습니다.


  하소연하고 싶을 때도 많고 어디 가서 소리를 지르고 울고 싶은 시간들도 많습니다. 가끔은 동기들과 만나 한풀이라도 해야 달아오른 스트레스가 가라앉기도 합니다.


  그렇게 문득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집에서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사원인 저도 이렇게 하루가 고달프고 답이 안 보일 때가 많은데 조직에서 평생을 보내신 아버지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회사 일을 떠나서 울고 싶은 힘든 하루가 1년에 몇 번은 있는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우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요즘에서야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나약하다 생각했던 아버지가 이렇게 강인 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고 많이 보고 싶습니다. 한 번만 다시 웃어주고 힘내라고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는데 볼 수가 없습니다. 저도 남들처럼 가끔은 ‘아빠 이런 것은 어떻게 해야 해?’라고 물어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하시고 빠르게 악화되어가던 시간에도 전 믿지 않았습니다. ‘금방 괜찮아지실 테니까,,’,라고 어쩌면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져 왔을 때 저는 기도했습니다. 다시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시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었고 잠깐이라도 의식이 돌아와 ‘아빠 내가 잘못했어. 나중에 만나요.’라고 말하고 ‘아들아 어떻게 살아라’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습니다.


  가슴 아픈 기억들이 스쳐갑니다. 그로부터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그 몇 년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제가 이 회사에 입사하고 처음 부서 배치를 받던 시기에 아버지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때의 기억들은 아직도 조금 전의 일처럼 선명합니다. 그 선명함이 아버지가 세상에 저를 남겨두고 떠났을 때의 감정으로 남아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에 대해서는 소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란 이상한 기질이 있어서 항상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익숙함을 느끼며 새로운 무엇인가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연애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도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움찔움찔하게 하는 사람은 그 묘한 긴장감이 마음을 홀립니다. 우리는 곧잘 그렇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사람들은 가끔 익숙함이라는 단어를 소중함이라는 단어의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곁에 계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떠났다는 사실이 예전만큼 아픈 그림자로 마음에 드리워지진 않습니다. 가끔은 그렇게 잊어가는 스스로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잊히는 대상에 대한 자책감 혹은 그렇게 잊어버리면 내가 사랑했던 마음을 배신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합니다. ‘왜 나는 당연히 잊으면 안 되는 사람을 이렇게 잊어가고 있나?’ 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도 될 문제일까요? 그도 아니면 어떤 기억도 시간 속에 풍화되는 것이 사람의 인생인 걸까요?


  잊어가는 고통이 더 클지, 잊히는 고통이 더 클지 가끔은 궁금합니다. 어느 쪽이든 망각 속에 내던져진다고 생각하면 둘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유독 하루들이 길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평소보다 빠르게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어서 그런 걸까요? 지치는 날에는 해가 긴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감당해야 할 하루가 더 길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여름날에 유독 지치는 이유는 더위 그 자체도 있겠지만 감당해야 할 하루의 길이가 그만큼 길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이런 뜨거움도 한겨울이 되면 또 소중한 그리움으로 남게 되겠지요. 지금은 다양한 감정으로 느껴지는 익숙한 많은 것들이 각각의 소중함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하루는 당연했던 것들의 소중함을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어떤 것들은, 어떤 사람들은 계절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시는 잡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당장 그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면 가슴을 산산조각 내는 아픔이 있습니다. 사소한 것들이 더는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고 마음에 남을 때 우리는 후회를 합니다. 그런 후회가 살면서 많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선선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항상 좋은 하루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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