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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중근 장군을 기리는 9가지 이유

by 감탄쟁이


철학자 사르트르는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체 게바라를 지목하였다. 나도 체 게바라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만약 사르트르가 안중근을 알았다면 그 인물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은 안중근이며 그를 알면 알수록 존경심을 넘어 종교적으로 믿고 싶을 정도의 기분까지 든다. 몇 달 전 방영한 KBS의 '역사저널 그날'의 안중근 편을 본 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이 글을 쓴다.




1. 노블레스 오블리주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와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해주에서 이름난 부자의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결혼도 일찍 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제 발로 가시밭길을 걸어 들어갔다.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 제적인 훌륭한 행동은 기본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기에 이러한 행동은 얼마나 큰 결단을 필요로 하는지 느낄 수 있다. 인생 전체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는 불가능하다.



2. 완벽한 평화주의자

안중근은 의병대장으로서 전쟁 중 일본인 포로를 석방한 적이 있다. 일본 수비대와 교전 중 잡은 포로 중에는 상인들도 있었다. 동료 의병 장교들이 포로를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죽이지 않았다. 안중근은 포로들에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풀려난 포로들은 안중근 부대의 위치를 알려 결국 의병부대는 패하고 만다. 이러한 점에서는 결과적으로 포로 석방이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그가 철저한 원칙과 신념을 가진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포로를 사살하지 않는다는 당시 만국공법을 지켰다.

'의병 전쟁을 하는 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일본과 싸운다고 해서 일본인 하나하나를 다 죽일 수가 있느냐? 그리고 그게 바람직한가? 내 행동으로 일본인들이 감화를 받아 제대로 된 일본인이 나온다면 장기적으로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셨을 것이다.

감옥에서 집필하던 '동양평화론'도 결국 더 이상 싸우지 말고 한, 중, 일이 힘을 합쳐 세계의 중심이 되자는 내용이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단결의 정신을 보여주는 성스러운 주장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 거룩한 제안을 무시해버렸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평화주의자를 일본 정부는 아직도 단순한 범죄자이며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해버린다. 정말 무식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 로직으로 이루어진 메크로가 끊임없이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최소한의 인간성과 상식과 교양이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평화적인 행위에 대하여 저런 경우 없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3. 진정한 종교인

안중근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다수의 눈살 찌푸려지는 종교적 활동을 매우 싫어하지만, 그래도 프란치스코 교황, 이태석 신부님, 장기려 박사 등 진정한 종교인을 보면 언제나 성스럽고 마음이 충만해진다. 안중근의 호처럼 불리는 '도마'는 그의 세례명 토마스의 준말이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온 가족이 천주교였다. 그의 멘토는 그에게 세례를 준 홍석구(빌렙) 신부이다. 안중근은 사형집행을 당하는 날까지 홍석구 신부를 존경했다. 그는 주체적인 종교인이었다. 일반적인 광신도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신앙을 믿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사형 집행 전 홍석구 신부는 안중근에게 살인을 한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했다. 멘토이자 아버지 같은 홍석구 신부가 안중근의 거사를 오해하여 마음을 아프게 하자 안중근은 아무리 천주교인이라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살인이 필요하였다고 피력하였다. 이처럼 그는 종교에 끌려다닌 것이 아니라 종교를 통해 더욱더 확고한 자신을 만든 사람이다. 종교를 가진 이라면 누구나 본받아야 할 것이다.



4. 위대한 철학자이자 정치인, 예술가

안중근은 어릴 적부터 무인의 집안에서 무예에 소질이 있어 호랑이를 때려잡았을 정도로 비범한 장수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한방에 즉사한 사격술은 한 번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의병 시절부터 그는 뛰어난 사격으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무인인 동시에 아름다운 예술가이자 탁월한 정치가, 위대한 사상가이다.

의병활동을 위해 어린 나이에 러시아를 찾아가 연해주의 최재영과 여러 독립운동 대부를 만나 협조를 요청한 점, 군인의 장군으로서 부대원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한 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체계적으로 조직을 모으고 실행한 점 등. 이러한 부분에서 그는 사람을 잘 이끄는 카리스마 있고 훌륭한 리더이고 정치인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러 재판장에 끌려가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5가지 이유를 발언할 땐 그가 얼마나 사상적으로 완벽하게 정리되고 철학적인 신념이 있는 인물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동양 평화론도 한 나라만이 아닌 동아시아 발전을 위한, 전 세계를 통솔할 수 있는 시대를 앞서간 지도자적 발상이다.

그는 글도 잘 써 감옥에선 많은 사람들에게 글씨를 써 주며 유묵을 남겨주었다. 이렇듯 안중근은 다방면으로 월등한 사람이다.



5. 의병활동, 의병대장

안중근은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 대장이다. 문득 그 당시 깊은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의병들의 상황이 상상된다. 어디 하나 편한 곳이 없고 식량공급도 힘들고 짐승은 얼마나 많을까. 살을 잘라버릴 듯한 추위와 싸워야 하고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를 견뎌야 한다. 전화도 연락도 당연히 없기 때문에 다른 부대나 누구와 잠시라도 대화하기 위해선 불확실한 정보를 의지하여 수 백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한다. 안중근 장군도 홍범도 장군을 찾으러 먼 거리를 이동했지만 실패한다. 간도의 독립운동가 이범윤을 만나고,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과 연합하여 무장군대를 조직한다. 그리하여 안중근 장군은 크고 작은 게릴라 전에서 승리도 많이 했지만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하고 모든 대원을 잃어 항일 무장투쟁에 실패하고 만다.

그 실패의 죄책감과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자르는 결의를 다지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성공으로 이끈 셈이다. 그가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이 의병활동을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의병대장으로서 그의 활동을 잘 모른다.


6. 단지동맹의 고통

'동지들,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의병투쟁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소.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으니 좀 더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오. 소수정예의 힘으로 손가락을 끊어 대학 독립 네 글자를 혈서로 쓰고, 3년 안에 나라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죽이지 못하면 자결합시다.'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며 독립의 결의를 다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상황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 하나가 사라지는 고통을 인내하며 하는 결의는 난 평생 못할 것 같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모두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숭고한 정신을 한국인이라면 항상 기려야 할 것이다. 가끔 몸에 저 숭고한 손도장을 타투로 새기는 사람을 보았다. 타투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었다. 자신의 몸에 안중근의 정신을 몸에 새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7. 소통할 줄 아는 사람

동양 평화론에서도 보듯이 그는 단순히 복수심에 불타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외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깨어있는 정신의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일본인이라도 그를 대하는 간수들에게는 친절히 대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유묵도 묵묵히 그려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를 존경하는 일본인이 많았고 아직도 그 후손들은 일본에서 안중근을 기리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보다 훨씬 낫다.



8. 훌륭한 어머니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9. 젊은 나이

지금까지 본 이러한 안중근의 위대성은 그의 나이 31세 이전에 이룬 것들이다. 그는 31세에 순국하셨다. 30대 초반, 결혼을 해도 이른 나이일 수도 있는 젊은 나이이다. 의병 장군, 단지 동맹, 이토 히로부미 거사, 모두 20대의 청년이 이루어 낸 업적이다. 범인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사상과 행동은 마치 수 십 년 인생을 산 현자와도 같다. 그가 오래 살아있었다면 세상은 어떻게든 바뀌었을 것이다.




모든 초등학교에 안중근 동상이 세워지고 그의 순국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어도 전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도 그의 성품을 기리는 마당에 한국에서 안중근은 너무나 과소평가되어있다. 정확히 어떠한 일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 암살 외에는 한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의견도 보았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그가 순국한 지 100년도 더 지난 현재, 그가 그토록 바라던 동양평화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안중근과 같은 위인의 역사를 가졌다는 것에 자랑스러워하여야 하고 더욱 체계적으로 그를 기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