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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탄쟁이 Sep 25. 2016

코스모스 (칼 세이건/사이언스북스)

140억년의 시간을 품은


" 코스모스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늑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칼 세이건을 예전부터 알고싶었다. 칼 세이건이 죽기 전 한 '나는 이제 無의 존재로 돌아갑니다. 문득 내가 생각날 땐, 하늘을 바라보세요.' 이 한마디에 꽂혀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읽었다. 


코스모스를 과학도서라곤 하지만 '과학도서'만으로 여겨선 안된다. 책의 기본 뿌리인 천문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기하학, 수학은 물론 철학, 세계사, 고대사, 정치, 예술, 문학, 고대신화, 종교, 미래학 등 온갖 종류의 학문이 집대성된,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인류의 미래를 바라보는 억겁의 시간을 정리하고자 한 인류의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책을 100%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운 과학용어를 쉽게 풀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그 시선을 따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과학 지식을 통해 칼 세이건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몰랐던 온갖 지식이 한꺼번에 머리에 들어오니 정리도 안되고 정신없었지만, 책을 덮고 나니 느낀점은 의외로 간단하게 표현이 된다. 바로 살아있음이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무한의 코스모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역으로 가장 작은것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우주의 기원을 알기 위해 점점 별과 태양계와 지구의 탄생, 생물의 출현 등으로 범위가 작아진다. 더욱 내려가 수많은 진화를 거친 인류의 태동, 인류의 역사와 문명, 고대의 지식과 과학,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혁신적인 발견과 과학자들. 탈레스,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 유클리드, 히파티아 등 수많은 고대의 명석한 과학자들, 종교의 억압, 레오나드로 다빈치, 케플러,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 등 근대의 천재들... 그리고 현대.. 다시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 과학의 급진적 재발달, 달으로의 여행, 화성과 목성 탐사 스토리, 거대한 전파망원경, 외계와의 통신, 성간 여행, 빛의 속도, 블랙홀, 이 모든 것을 통한 칼 세이건의 최종 도착지는 인류의 소중함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읽었던게 떠올라 읽을 때의 벅찬 마음이 진정이 안된다. 이렇게 코스모스를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과학이 정말 아름다운 학문임을 알게 해준다. 과학자들도 알고보면 모두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과학의 신비를 풀어낼수도 없고, 어려운 공부를 계속 지속할 동기도 주지 못할 것이다. '수학 계산의 쳇바퀴에 저를 온종일 매어두지는 마십시오. 철학적 사색은 제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오니, 제게 사색할 여유를 허락해 주십시오.' 케플러의 말이다. 보이저호가 태양계를 떠났다고 한다. 우주에 홀로 남겨져 인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보이저호의 외로운 여행은 픽사 애니메이션 Wall-E를 생각나게 한다. 보이저호의 태양계 탈출, 칼 세이건이 살아있었다면, 정말로 기뻐했을 것이다.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딱 하나 안타까웠던 부분은, 역시나 종교였다. 중세 종교는 철학, 예술, 과학사로 볼 때 암적인 존재였다. 기원 전 탈레스,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등 수많은 과학자들은 엄청난 과학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 당시 컴퓨터도 없이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고, 별들을 관측하는 등 수많은 과학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파괴되고 그 후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까지의 1000년은, 종교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억압이 자행되었다. 만약, 인류의 잃어버린 기회라고 불리는 이 암흑의 1000년이 없었다면 지금쯤 과학은 아마도 현재보다는 훨씬 더 앞서나가 있을 수준이 되었을 것이다. '신, 창조주'를 인간의 입장이 아닌 우주의 입장으로 보면 종교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깨닫게 된다. 역사 속의 어리석은 사제들이 종교를 '인간'의 입장으로 해석하여왔기 때문에 수많은 살육이 벌어졌고 과학은 정체되고 혁신적인 인물들은 억압받았다. 케플러도 신을 믿었다. 하지만 그는 신이 우주의 섭리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인간중심의 종교관은 이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너무나 안타깝다. 기독교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성경을 문학적 가치적으로 꼭 읽으라고들 한다. 난 그 두꺼운 성경 읽을 시간에 이 코스모스를 두 세번 더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 성경도 지극히 인간적인 입장에서 씌여진 책이다. 우리는 이제 우주를 이해하여야 한다. 관점을 우주로 넓혀야지 우리 인류와 삶을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코스모스야말로 감히 진정한 인류를 위한 평화서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먼 훗날 인간이 먼 우주의 외계문명을 발견하고 인류의 존재가치와 과학의 역사가 새로이 다시 쓰여지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 코스모스는 인류의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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