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창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탄쟁이 Sep 25. 2016

점선뎐 (김점선 / 시작)

옥단춘뎐, 숙영낭자뎐, 춘향뎐, 그리고..



" 이왕 배를 여는 데 왕창 잘라내주시오. 나는 늘 내 창자들이 쓸데없이 긴 게 불만이었소.

내가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내장은 크로마뇽인과 다름없지 않소.

나는 나의 내장을 디자인하고 싶소. 

... 이왕 배를 열 거면 나를 도와주시오 "




김점선. 나는 그녀를 몰랐다. 김점선은 2009년 3월 22일에 돌아가셨다. 암에 걸려 투병하던 중 마지막으로 자신의 자서전을 썼다. 점선뎐. 이 책을 유작으로 그녀는 하늘로 떠났다. 떠난 후에야 알았다. 


김점선은 자유인이다. 영혼이 순수하다. 세속에 빠지지 않는 예술가이다. 인간실격을 읽으면서 순수한 사람은 소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줄 알았다. 잘못 생각했다. 현실에도 얼마든지 있다. 김점선을 읽으면 백남준, 한대수, 이중섭이 생각난다. 다 괴짜들이다. 난 괴짜가 좋다. 괴짜들은 세상을 더 다양하고 재미있고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괴짜들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예술이다.

'사는 것이 예술이다. 죽을 때 나라는 것에 감동하고 싶을 뿐.' 내 좌우명이 된 다카하시 아유무의 말이다. 

김점선도 말한다. '각자의 삶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다.' 통한 것 같아 기쁘다. 


이 책에선 유년 시절부터 생각했던 것을 적어나가고 있다. 수십 년 전이었을 텐데 몇 년 안된것 같이 정확하고 꼼꼼하게 그녀의 그 시절 당시의 감정을 묘사하고있다. 얼마나 영향이 큰 일이고 감정에 충격을 느꼈으면 이렇게 세세하게 잘 기억하는 것일까. 김점선은 '가장 최선의 상태에서 익명의 사람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남기는 최고의 인류애를 표현한 방식이 바로 책을 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피천득은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를 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하였다면 그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김점선은 가난했고 육체의 생은 비록 암으로 짧은 편이었지만, 실은 참으로 마음의 부자이며 장수한 사람이다. 나도 훗날 내 삶을 뒤돌아보며 작품 하나를 남길 수 있을까? 신해철은 'Questions'라는 곡에서 묻는다. '내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고 또 느껴야 하는가? 내게 다가올 끝날이 오면 나는 무엇을 찾았다 말해야 하는가?' 죽을 때 명쾌한 대답을 하고 싶다. 김점선처럼.


'체 게바라, 빈 라덴, 김삿갓, 홍경래, 임꺽정, 아르튀르 랭보, 오스카 와일드 같은 사람들이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 대표적인 튀는 사람들을 열거했을 뿐 역사상 반항아들, 저항아들은 무수히 많다.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람들의 절반 정도는 반항과 저항으로 출발해서 자신의 정신적인 왕국을 만들고 죽은 자들이다. ...

암 덩어리들이 내 몸속에 생겼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나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 생애는 저항과 반항으로 점철된 생애다. ... 내 몸에 '앎'이 생겨난 것은 내 몸이 정신과 일치한다는 증표다. 이제야 속과 겉이 같은 사람이 되었다. 오랜 수양의 결과로 환갑을 넘겨서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된 것이다. 이런 내 몸애 경의를 표한다.'

- p. 224~226


김점선은 암도 예술로 보았다. 삶을 예술로 보는 김점선에게는 죽음까지도 결코 두려운 대상이 아니다.

반면에,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읽는내내 아빠미소 지으며 행복하게 읽은 편도 하나 소개한다.




지금도 설 차례상 앞에 서면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그 추억에 나는 저절로 웃음을 머금는다. ...(중략).. 사춘기를 거치면서 여러 나라 시인들이 쓴 시를 읽고 그들의 생애를 알게 됐다. 수많은 시인들이 후대가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언제부턴가, 명절날 차례를 지낼 때면 그들이 문득 생각났다. 죽은 시인들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아르튀르 랭보가 제일 불쌍했다.

그러던 어느 해, 아버지 몰래 불어와 한자가 뒤섞인 지방(紙榜)을 썼다. 그렇게 몇 번 차례를 지내고 나서는 붓으로 정성들여 써보기도 했다. 그 랭보의 지방을 식구들 몰래 차례상 뒷다리, 안 보이는 곳에 붙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뗐다. 조상님들이 음식을 잡숫는 시간에 나는 속으로 말했다. 


'랭보 씨, 음식 먹는 시간입니다. 어서 드십시오.'


차례가 끝나면 몰래 지방을 떼어내서 뒤뜰에 가 혼자 태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며칠이고 내 책상 속에 감춰두기도 했다. 

조상님들은 그런 나를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식구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한 번도 누구에게 들킨 적이 없었다.

나의 이런 행동은 몇 년년이나 계속됐다. 나중에는 랭보 외에도 프랑스 시인 베를렌, 말라르메, 보들레르의 지방도 만들었다.


'어서 와 드십시오. 한국 설날의 차례상을 즐겨보셔요.'


내 사춘기의 명절에는 이렇게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 있다.

- p. 83




김점선을 떠난 후에야 알게되어 너무 안타깝다. 

이해인 수녀, 박완서 작가, 최인호 작가, 장영희 교수, 정호승 시인, 사진작가 김중남, 앙드레김, 조영남, 피아니스트 신수정 등.. 김점선의 친구들이다. 친구들만 봐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이들과 함께 한 김점선을 생각하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

김점선이 떠나고 1년 후 추모 1주기가 열렸었다. (꾸준히 매 년 열리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그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행사를 주최했다. 이날 추모의 밤에선 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이 소개됐는데, 유언 같은 마지막 육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내 걱정 말고 자기 일들이나 열심히 하쇼!”

매거진의 이전글 코스모스 (칼 세이건/사이언스북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