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창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탄쟁이 Sep 25. 2016

신해철 유고집, 마왕 신해철 (신해철/문학동네)

그나마.. 정말 다행이다



신해철이 이미 세상을 떠난 것 자체가 불행이지만, 그래도, 이 믿기 힘든 사실 속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쓴 글들을 엮은 유고집이 신속하게 출판되었다는 점이다. 신해철은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인물이라, 그가 쓴 글들은 과거 싸이월드, SNS, 팬클럽 사이트, 인터뷰, 신문기사 등 여러군대 흩어져 있어 누가 정리해 주지 않으면 한꺼번에 정리하여 읽기가 쉽지 않았다. 


2008년 임진모와의 인터뷰 중에서 나중에 평론가를 할 마음은 있는지에 대해 "평론가가 될 자질도 없고, 글 쓰는 것에 대한 무서움도 알고. 그게 얼마나 무서웠으면 내가 글을 직접 못 쓰고, 대담집이라고 해서 인터뷰집(쾌변독설)이나 내겠냐고. 내가 제일 독종이라고 생각하는 게 실은 글쟁이야. 난 그거 할 자신 없어요."라고 직접적으로 글 쓰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천하의 달변가가 과연 글을 잘 못 쓸까? 글을 잘 써도 말은 잘 못할 수도 있지만, 말을 잘 하면 상대적으로 글 쓰는건 수월하기 마련이다. 특히 신해철 노래의 가사는 하나하나가 모두 한 편의 시이고, 수많은 독서를 통해 형성된 그의 문장력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화려한 비유와 언어의 마법같은 단어선택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가령 그가 2005년 9월에 쓴 이런 글이다.


“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의 총합이 내가 도달하지 못한 모든 것들의 총합에 결코 미치지 못하리라는 당연한 사실이 생각에 미칠 때, 공허는 가을날 열린 들창문 사이로 파고드는 스산한 바람처럼 마음의 무른 속살 안으로 파고든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의 총합과 지금껏 살아온 시간의 총합의 무게추가 기울어 질 때, 시간의 앞에서 종종걸음 치던 발걸음이 시간의 뒷편에서 버겁게 뛰어가는 가쁜 달음박질이 될 때, 포기의 유혹은 나른한 여름날의 낮잠처럼, 끈적한 정사의 뒷맛처럼 귀를 간지른다.


굴욕에는 분노로 맞서고, 좌절에는 몸부림으로 대항하며, 슬픔에는 망각으로서 마주한, 공허 앞에선 그저 기만으로 도피하나니, 불멸 할 수 없는 뻔한 것들에 하나하나 의미와 이름들을 크리스마스 트리의 반짝이는 장식처럼 달아나는 나그네여, 그 모든 것들을 퇴락의 무저갱으로 이끌 저 아침해는 이미 떠오르는데, 이미 한번 창천을 비상하는 교만을 알아버린 오기와 독선의 날개는 한순간의 기도를 위한 착륙을 허락하지 않는구나. ”


그래서 신해철이 쓴 글들이 엮어 책으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글을 읽다 보면 목소리가 들려 음성지원이 되는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내가 신해철에서 못빠져나오는 여러가지 수많은 셀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 참 많고 공감이 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해철을 평가할 때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이라는 문장을 앞에 달고 시작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문장과 정 반대이다. 내 생각과 그의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나갈 때 쾌감을 느끼며, 그럴수록 더욱 추종하게 된다.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그가 말해줌으로써 반가움을 느끼며 공감을 얻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생각치도 못한 부분들을 그의 영향을 받아 어떠한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무비판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신기하게도 본받으면 안 될만한 생각은 거의 찾질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은 더욱 소중한 것이다. 물론 그의 생각들 중 한없이 작은 부분만을 엮은 책이지만 그래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말을 통해 우주를 만들 것만 같은 언변"의 신해철이 더욱 그립다.

아직도 그가 해줄 말은 끝이 없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점선뎐 (김점선 /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