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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탄쟁이 Sep 25. 2016

남자의 물건 (김정운/21세기북스)

물건이 있어서 존재하다



김정운 교수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말하는것처럼 생생하게 글이 들려오며 그의 말투와 사상이 저절로 음성지원이 된다. 

어울리지 않게 뻔한 자기계발서 스타일의 1부에서는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것도 많지만 가볍게 읽어넘길 부분도 많다. 그런데 그 공감하는 것의 정도가 너무 깊다는 것이 신기하다. 내 생각이 저 아저씨와 너무 비슷하다는 건 내가 내 나이에 맞지 않은거 아닌가? 좋으면서도 씁쓸하다. 가령, 내가 최근 생각해낸 행복론이 그의 행복론과 너무나 닮은 것부터 - 행복을 거창하게 생각해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게 분명해야 설레는 삶을 살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난 한 주간 내 일상에서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된다. 내가 가슴 설레며 기다렸던 일을 기억해내면 된다. 바로 그 일들이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들이다. 그 설레는 일들을 끈임없이 계획하며 살면 된다. (p.34) -, 시간에 대한 생각 -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기억할 일들을 자꾸 만들면 된다.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들을 시도해야 한다.(p.70) - 등등.


이렇게 1부가 지나가고 2부에서 본격적인 '남자의 물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감탄과 감탄의 연속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 정도로 열렬히 수집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특별한 나만의 물건에 대한 이야기. 나에게도 과연 그런 물건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읽어내려갔는데, 나만의 물건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삶이 의미없거나 재미없지는 않을 것 같다. 여기서 소개하는 분들은 마치 그 물건을 통해 삶의 이유를 얻는 것처럼 조금 심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오타쿠..) 졸라 멋있다.


"물건에 헌신하다 보면 내가 사라지지. 

행복과 불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는 거야. 빠지고 몰입하는 거라고.

'자아'라는 주체로 서는게 아니라 대상에 함몰되는 거지. 

돈이나 밥이 아닌 다른 것에 함몰되는 것은 참 근사한 거야."


- 시인 김갑수의 물건, '커피 그라인더' 中



한 사람의 물건 안에 투영되어 있는 물건 주인의 인생을 엿보는 재미도 흥미로웠다. 금방 말했지만, 졸라 멋있는 거다. 그 사람이 살아 존재한다는 생생함이 느껴졌다.


이어령의 책상, 신영복의 벼루,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 안성기의 스케치북, 조영남의 안경 등 유명인들의 물건들.. 

나의 물건은 무엇일까? 책 속의 인물들처럼 삶에 있어서 물건과 합치하는 내공과 경험이 쌓이진 않았지만, 굳이 골라보자면 5년 전 부터 쓰기 시작한 내 노트들을 꼽고 싶다. 용도별로 기록하는 내 생각과 감성, 계획이 집약된 여러가지 내 노트들. 죽을 때 까지 간직할 내 보물 1호들. 


'여자의 물건'에 대해서도 흥미가 생긴다. 남자들이 쓰지 않는 물건도 나올 것이고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을 것이다. 누가 엮어서 책 한권 내주면 좋겠다.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형용사가 다양해져야 남의 말귀를 잘 알아듣게 된다.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라곤 기껏해야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 몇 개가 전부인 그 상태로는 어림 반품어치도 없다는 거다. 

- p.62


남자아이들이 울면 부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다. "울지 마! 사내놈이 왜 울어!" 좋아서 날뛰면 또 그런다. "사내놈이 왜 그렇게 가볍게 까불대니!" 

도대체 우는 것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사내놈'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능력이 애초부터 억압되어 있으니 어찌 남의 정서를 읽는 능력이 발달할 수 있을까? 남자들에게는 사회적 가치,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절차가 기초부터 꼬여 있다는 이야기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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