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k의 식물

식물화

by 붓꽃

어릴 적엔 어느집이나 반드시 책꽂이에 ‘백과사전전집’이 웅장하게 꽂혀 있어야만 했다. 나도 그랬었다. 백과사전은 출판사 별로 종류가 많았지만 순서는 비슷했다. 대부분 1, 2권은 우주를 다루고 있었고, 3, 4권은 인체의 신비같은 걸 다뤘던 것 같고, 그 다음은 공룡 그 다음 권은 동물의 세계였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7. 8권 정도에 ‘식물도감’ 같은걸 싣고 있었다.


공룡이나 동물의 세계를 다룬 책은 너무 읽고 읽어서 너덜너덜해지기 일 수였지만 식물도감 같은 경우는 아니었다. 한번 펼쳐보는 정도였거나 학교 숙제 때문에 몇페이지 참고하는 정도였다. 식물이라는 것은 나에게 큰 매력을 어필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경에는 식물이 동물, 사람보다 먼저 창조되었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동물보다 후자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마치 백과사전의 순서처럼 식물이 동물보다 앞서는 걸, 혹은 비중있게 다루는 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도 그렇다. 운동을 잘하는 사람에게 ‘동물적인 감각’ 이 있다고 하지

‘어, 저 친구 식물적인 감각이 있네?’ 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너 상당히 식물적이네??’ 라고 표현할만한게 있나??

‘너 얼굴이 식물처럼 초록색이구나?? 혹시 드래곤볼 나메크성의 피콜로니??’ 라고 물어보는 경우 빼고.


동물을 다루는 다큐도 많고, 동물을 의인화한 영화같은 것들도 많지만 식물은 그렇지 않다. 식물의 세계같은 프로그램은 나는 본 적이 없고, 방영한다 해도 시청률이 동물보다는 적었을게 분명하다. 또 식물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영화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식물은 동물보다 매력적이지 않다는게 내 결론이다. 뭐가 더 중요하고 안중요하고를 떠나서 말이다. 일단, 가장 수동적이라서 그런 것 같다.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고, 어떤 감정을 어필하거나, 스스로를 채워나갈 수 없어서 환경, 계절의 변화에 전적으로 기댈 수 밖에 없으니까.

‘식물아, 주어진 변화에 따라 살고 죽어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이구나.’


그리고 늘 주연, 조연, 조연의 조연도 되지 못한다. 늘 배경에 가까운 역할만 한다. 먼저 말한 수동적인 특성 때문이겠지만. 그래서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비중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서 사실상 역할이 없는거나 마찬가지겠다. 단순한 배경이니까.


삶의 바운더리가 너무 좁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동물보다 넓게 분포되어 있겠지만, 하나하나 떼어보면 그 무엇보다 생명의 영역이 좁고 약하다. 그리고 한번 정하면 바꿀 수도 없다. 너무 큰 한계가 아닐까 싶은데 뭐 하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의 형태이다. 두 다리, 혹은 네 다리도 아니라 겨우 몸통 하나 세워서 모든 환경을 버텨내야 한다니…그 노력의 고통은 얼마나 고단할지…


생태계에서도 가장 약자라는게 매력요소에서 아주 감점사항이다. 맨날 뜯기고, 뽑히고, 먹히고. 한번쯤은 당당하게

‘더 이상 먹히기 싫어!! 저리가!! 내가 밥으로만 보이냐!!’

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걸 보고 싶지만 그러는 식물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좀 용기 있으면 소심하게 몸에 가시 몇개 꽂아두는 정도?? 하지만 그런 선인장도 낙타의 밥이지 않나.


그렇게 식물을 매력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내가 식물을 닮아가고 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나이를 먹으면 다 그렇게 되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시…나만 그런거라면…’ 이라는 생각이 들면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던 내가 갈수록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걸 경험한다. 처음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은 하루에도 수십번 ‘한계’ 라는 놈을 만나면서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보다는 더 이상 혼자선 할 수 없는게 점점 늘어나고 있고, 다 하고 싶었지만, 몇개만 겨우 선택해서 해야만 하는 패턴으로 바뀌고 있으니 말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그렇게 되어가겠지.


인생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포부도 있었었지만, 갈수록 역할은 주연에서 조연, 조연에서 까메오. 씬스틸러라도 되고 싶었지만 갈수록 지나가는 엑스트라같은 역할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분명히 내 인생에서 나의 씬, 나의 대사, 액션이 많아야 하는데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내 인생에 내가 없는 이상한 인생. 마치 홍철 없는 홍철팀 처럼.


나름 강하고, 튼튼하고, 자존심도 있고, 할말있으면 하는 당당함도 조금은 있었었는데 지금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쭈구리 중의 쭈구리가 되었다. 불평, 불만, 할말이 있어도 금새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냥 좋은게 좋은거지 뭐’ 하고 넘어가는 나를 보면서 ‘그러면 안돼!’ 따지고 싶지만 ‘다 그런거지 뭐’ 라는 태도가 금새 튀어나와 쭈구리의 모습을 이어간다.


누군가는 그게 철이 드는거라 말하겠지만, 철이 드는게 이렇게 슬픈거라면, ‘식물화’ 되어가는 거라면 진작에 피할 걸 그랬다. 차라리 욕을 더 먹더라도 철들지 말걸……


이 글을 쓰면서 번뜩 깨달아지는게 있다.

‘아, 이러다가 결국은 식물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구나…’

언젠가는 ‘식물이라도 될 걸 그랬어’ 라고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날이 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

식물화 되어가고 있는 나에게 당장 깨끗한 물이라도 줘야할 것 같다.

할 수 있는게 이것 뿐이다. 정말 식물이 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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