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k의 밤

밤 11:30

by 붓꽃

예전같으면 큰 의미가 없었던, 어떤 기억도 담겨있지 않은 시간이다. “이 때 뭘 했었지??’” 생각해보면 표정없이 핸드폰이나 했을까, 축구 하이라이트나 찾아보고 있었을까…. 딱히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1년 정도 된것 같다.

밤 11:30에 정해진 습관이 생긴 것이.


약을 먹는 습관이 생겼다.

tv에서나, 유명인이나 먹는거라고 생각했던 약이다.


어느 날, 뜬금없이 나에게 찾아왔다.

사고라면 사고일 수도 있고, 재수없는 사건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사건의 한복판에서.


나는 낯가림이 심한편이라 사람을 사귈 때 꽤 시간이 걸리는 편인데

이 놈은 일방적으로 찾아와 강제적인 만남을 요구했다.

나의 yes, no에도 상관없이 말이다.

처음이다.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그 놈은 자신의 이름을 ‘불안’ 이라고 소개했다.


이 놈은 모든 순간에 ‘함께 하는 것’ 을 요구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섭을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이 관계가 너무 낯설어서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해주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었다.

그냥 내가 무조건 참아주기만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1년정도 함께 하다보니 전보다는 익숙해진 것도 같지만

하지만 불안이라는 놈은 성격이 괴팍해서 여전히 ‘툭’ 하고 낯선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늘 예상밖에 있는 이 놈은 이렇게 늘 방해만 한다.


불안 이라는 놈은 나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까지 나를 바꾼 존재가 있었을까??


항상 자신을 집요하게 의식하길 바라는 눈치다.

잊고 있다가도 자신을 떠올리게 만들어 불안하게 만들고,

더더욱 예민해지고, 피곤하게 만들어 그렇게 하루하루를 포기하길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내가 편하게 있는 것을 가장 싫어해서 늘 불편하게 있길 원한다.


마치 성경에 있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말씀처럼

‘내가 불안이니, 너도 불안해라’ 라고 하는 외침을 늘 들려주는 것 같다.


그래서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던 하루를 가끔은 힘든 고비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연속적인 일을 하지 못하게 늘 쫓아와 가로막고 튀어나오는 ‘스토커’ 같은 기질도 가지고 있다.


사회적 거리를 요구해도, 약간의 매너를 요구해도

깜빡이 없이 갑자기 훅 하고 들어오는 이 놈은 내가 만난 인연 중에 가장 지독하다.


지금은 좀 괜찮아졌지만 밤이 오는걸 조금은 두려워했던 때가 있었다.

한 때, 불안이라는 이 놈은 밤만 되면 유독 집요하게 찾아왔어서 말이다.

아, 그래서 약도 밤11:30에 꼭 챙겨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이 놈이 만들어준 습관이구나. 젠장.


낮에 만나는 이 놈과 밤에 만나는 이 놈은 다르더라.

눈을 뜨고 만나는 낮에는 불안의 새빨간 얼굴과 거친 질감을 조금은 볼 수 있지만

하지만 밤에 만나는 불안은 눈을 감고 만나야해서 조금도 알아볼 수가 없어서 말이다.

무슨 얼굴로, 무슨 일로 찾아온건지…

이게 또 불안이 가져다주는 불안의 매력이라고나 할까?


이 놈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몇가지 증상을 함께 가지고 온다.

지 딴에는 선물같은 거일 수도 있겠지만 늘 최악이었다.


뭐, 여러 신체적인 증상도 있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불안이라는 놈이 가져다 주는 불안은 모든 것을 불안하게 해서

확실한 것도 확정된 것도 없게 만들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날 안만나고, 다른 약속을 잡는다고?? 날 안만나고??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며칠 후의 작은 약속까지도 이렇게 만드니, 내 나름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계획을 파괴시켜 버렸다. 그렇게 1년을 사귀는 중이다.


놈과 헤어지고 싶어서 밤11:30마다 몰래 손톱보다 작은 알약을 먹는다.

내가 이 작은 것보다 전투력이 약한건가 라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지만


“이 작은 것이 잠시도 나를 혼자 않는 불안을 떼어내게 만들어준다니…마법의 약인 것인가?"


라는 생각과 함께 마법이 마음껏 발휘되길 기대할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약을 먹는 것이 ‘불안’ 에게 들켜서 가득 화를 내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밤껍질’에 박혀있는 가시만큼 ‘가시돋힌 밤’을 억지로 맞이 해야만 한다.


이럴 때는 정말로 방법이 없다.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달래기 힘든 불안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따가운 밤의 가시가 내 깊숙히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이별이 기다려지는 인연은 처음이다.

제발 나를 뻥하고 차주길 기다리는 것도 처음이다.

조금의 설레임도, 기쁨도, 희열도 없이 그냥 고통만 있는 관계라니.


모든 만남이 습관을 가져다주듯이 이 놈도 나에게 많은 습관을 가져다 주었는데

헤어지면서 이 모든 습관의 작은 한줌까지 다 가져가 주었으면 한다.


“우리 헤어지자, 난 평안을 만나고 싶거든, 환승이별이라 욕해도 상관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