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알바 18기 2차 과제, 그 뒷이야기
스마트폰을 처음 썼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깔았다 지웠다를 반복한 어플리케이션을 고르라면 아마도 알바천국일 거다. 휴학 신청 버튼을 누르고 나서는 내 폰 화면 제일 상단에 위치해있던 그 어플이, 복학을 하고 나서는 들여다 볼 일이 없다며 미련없이 지워졌다. 조건이 괜찮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고는 바로 삭제했던 그 어플을, 알바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면 자연스럽게 다시 내려받곤 했다.
5월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금 있는 곳에서 더 오래 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알바천국 어플을 설치했다. 김세정씨의 표정연기를 보며 로딩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미 검지손가락은 익숙한 ‘맞춤알바’로 찾아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딩이 끝나고 뜬 알림창 하나. 내 검지손가락은 생각할 틈도 없이 ‘지원하러 가기’ 버튼을 눌러버렸다. 바로 천국의 알바 18기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천국의 알바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 알바천국에서 이런 활동을 기획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몇 번 공고 내용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거나, 선뜻 지원할 자신감이 생기지 않아서 그냥 창을 끄곤 했다. 그런데 코펜하겐으로 가는 이번 천국의 알바 18기는 달랐다. 합격만 한다면 가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고, 내가 정말로 잘 해낼 수 있을만한 주제였다. 그날 나는 밤을 꼬박 새워 자기소개서를 쓰고 이력서를 편집했다. 내 혼을 갈아넣다 못해 조상님의 영혼까지 끌어다 넣었다. 그리고 6월 12일, 서류 합격 메일을 받았다.
기뻐할 새도 없이 주어진 2차 미션. 수첩을 꺼내 1차 서류에 지원하고 난 뒤에 끄적였던 내용을 펴보았다. 천국의 알바 18기 활동 장소인 KOPAN RICE에 대해서 알아보고, 만약 새 메뉴를 만들게 되거나 팝업 행사를 진행하게 된다면 어떻게 기획하면 좋을지 생각해보았던 내용들이다.
식혜, 수정과, 생강차 같은 한국 식음료
애호박전
전병
닭갈비
족발
죽
냉면
...
이것 말고도 목록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온다. 하나하나 들여다 보면서 왠지 마음이 썩 시원치 않았다. 뭔가 핵심을 관통하는 생각 하나가 수면 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해줬다. 아름다운 아이디어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내 머리 속에서는 유독 전통을 강조하는 메뉴들만 떠올랐다. 그러다 한 친구의 말에 수면 아래의 생각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굳이 전통만이 아니라 현재의 한국 음식을 그대로 보여줘도 좋지 않을까?
바로 그거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나는 뭔가 무지하게 한국적인 것을 선보여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전통 음식을, 내게 익숙하지도 않은 옛문화를 떠올렸다. 너무 낡은 인식이었다.
내가 ‘그 나라의 그 음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나라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즐겨 먹는 ‘맛있는’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음식이 유구한 전통을 담고 있지는 않더라도, 그 나라의 현재 식문화를 잘 담고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또, 내 입맛에 꼭 맞게 변형되지 않아도 맛이 좋다면 굳이 찾아가서 먹을만한 가치가 있다. (천국의 알바 18기 2차 과제 본문 중)
현재 한국의 식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것을 전통이라는 이유로 굳이 꺼내들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한국 음식이라는 정체성을 찾아볼 수 없을만큼 변형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도 의미없게 느껴졌다. 딱 현재의 한국 음식, 한국 식문화를 정말 ‘맛있게’, ‘재밌게’ 풀어내면 그걸로 족하다.
그렇게 기획할 메뉴와 행사의 방향은 정했고, 이제 고운 모양새를 갖출 차례였다. 하지만 생각해둔 메뉴를 맛있게 만드는 건 자신 있었어도, 사진에 잘 나오도록 예쁘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조명빨이라도 잘 받으라고 미니스튜디오를 만들기로 했다.
폼보드를 잘라 핀으로 연결하고 그 위에 전지를 깔았다. 스탠드 두 개를 가지고 위로 조명을 설치했다.
짠. 귀여운 내 미니스튜디오다. 2차 과제가 끝난 지금은 베란다에서 얌전히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거실에 설치해둔 미니스튜디오로 가져와 사진을 찍었다. 이 각도 저 각도, 이 구도 저 구도로 찍는 게 은근히 재미있었다.
촬영을 마친 메뉴는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열성적으로 요리를 하느라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내가 잘 한 건지, 2차 과제를 하면서 만든 음식들 모두 아주 맛있었다. 사실 ‘맛은 없어도 괜찮으니까 예쁘게만 만들어야지’ 생각하면서 요리했는데, 어쩐 일인지 전부 별로 예쁘지는 않지만 맛있는 음식이 됐다.
구상한 메뉴 중에 토마토 칼국수가 있었다. 진정성을 살리겠다고 직접 칼국수 면을 만들었다. 정말로 힘들었다. 처음이라 더욱 서툴렀겠지만, 반죽을 하는 데만 30분 넘게 걸렸다. 반죽을 끝내고 나니 열이 올라서 두 볼이 빨개져 있을 정도였다.
밀대가 없어서 물통으로 반죽을 밀었는데, 사실 이건 좀 재밌었다. 어딘가에서 본 칼국수 장인 할머니의 솜씨를 흉내 낸답시고 얇게 편 반죽에 밀가루를 뿌려가며 돌돌 말았다가 펴고, 다시 밀고. 하지만 장인은 괜히 장인이 아니었다. 아무리 흉내내봐도 내가 민 반죽은 어디는 얇고 어디는 두껍고, 아주 엉터리였다.
호기롭게 첫 반죽을 칼로 썰어봤는데, 이것도 좀 재밌었다. 탕탕탕탕 소리를 내가며 프로가 된 기분으로 썰어냈다. 그리고 반죽을 봤는데... 어어 이상하다, 티비에서 봤을 땐 다 썰고 나서 살살 털어주면 면이 일자로 펴지던데...? 내가 썬 면은 서로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면을 하나 하나 손으로 떼어냈다.
그래도 완성된 면은 꽤 괜찮았다. 뿌듯함이 넘쳐올라서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엄마는 열이 올라서 빨개진 내 볼을 보고 웃었고, 마침 같이 있던 아빠는 그럭저럭 모양새는 갖춘 내 면을 보고 잘 만들었다고 칭찬을 해줬다. 그렇게 끓여낸 칼국수는...
아주 쫄깃하고 맛있었다.
유자비빔국수도 맛이라면 지지 않았다. 비빔양념장을 만들 때 마침 설탕이 다 떨어져 뭐 대체할 것이 없을까 찾다가 유자청을 넣었고, 이 우연한 발견으로 레시피를 구상하게 되었다.
비빔국수와 만두를 함께 내는 세트메뉴로도 제안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사진을 찍은 다음날 비빔국수를 또 한 번 만들어 만두와 함께한 모습도 찍었다.
국수 메뉴를 둘이나 만들었는데, 참 아쉬운 점은 젓가락으로 들어올린 사진을 너무 못 찍었다는 것이다. 원래 젓가락질을 잘 못하기도 하고, 면뿐만 아니라 다른 건더기도 함께 집어서 찍겠다는 욕심으로 너무 많은 양을 집어 올려서 도무지 먹음직스럽게 집히질 않은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여러 번 해봤으면 꽤 괜찮은 젓가락질샷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젓가락질샷을 두 세번 정도 찍고 난 다음에 바로 입으로 가져가 후루룩 면을 삼키고 말았다.
하루종일 요리하고 사진찍느라 ‘힘들다 힘들어’ 소리를 반복하면서도, 예쁘게 나온 사진을 보면 웃음이 비져나왔다. 2차 과제로 메뉴를 기획하는 일은 그만큼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과제 중 요리 말고 다른 부분은 사실 막연했다. SNS홍보 방안을 세운다거나, 팝업 행사를 기획해보는 것 말이다. SNS를 그만둔 지 꽤 되어 요즘 트렌드가 어떤지 전혀 몰랐고, 덴마크 현지에서 어떤 홍보나 행사가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달리 방법이 있으랴. 주위에 물어보거나 웹에 검색해가며 내 머릿속 구멍을 메웠다. 나름의 분석과 타겟팅을 해가며 홍보 방안을 세웠다. 실제 이벤트를 진행한다고 생각하며 이벤트 포스터도 만들고, 팝업 행사 현장에 있는 나를 상상하며 행사의 내용을 써넣었다.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 때문에 2차 과제를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미션을 받고 나서 6일 동안은 퇴근 후 하루 3-4시간씩 과제에 시간을 들였고, 제출기한 마지막 날짜인 19일은 하루 종일 과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휴무를 신청했다.
19일 아침, 가방을 챙겨 집 가까운 까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거기서 커피 2잔과 베이커리 하나를 시켜먹으며 반나절을 내리 있었다. 화장실을 가거나 가끔 스트레칭을 할 때 빼고는 두 눈을 모니터에서 떼지 않고서, 오로지 사진을 보정하고 편집하고 글을 쓰는 데에만 정신을 쏟았다. 평소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7시간을 들여 첫 번째 과제 내용을 담은 글을 완성했다(첫 번째 과제 내용을 보려면 클릭). 엉덩이에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아 근처의 다른 까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 곳에서 두 번째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4시간 동안 또 다시 모니터만 바라 보았다.
제출 마감인 19일 자정을 두 시간여 남겨두고, 2차 과제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두 번째 과제 내용을 보려면 클릭). 홀가분한 마음으로 텀블러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마시고는, 미션 제출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 쇼파에 앉았는데, 내 몸에서 커피 냄새가 풀풀 나더라. 그만큼 까페에 오래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고, 한 가지에 깊게 집중한 적도 참 오랜만이었다.
본격적으로 2차 과제 준비에 돌입하기 전, 잠시 과제에 임할 자신감이 뚝 떨어진 순간이 있었다. 나는 아직 제대로 구상도 못했는데 벌써 과제를 완료하고 글을 올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고심한 흔적이 묻어나오는 그들의 포스트를 보며, 문득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떨어지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떨어졌을 때 ‘그래 사실 열심히 안 하고 대충 한 거야.’라고 합리화라도 할 수 있을텐데, 만약 무지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가 떨어져버리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할 것 같았다.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떨어졌을 때를 미리 걱정하며 미련한 자기합리화를 하기 위해 과제를 대충하겠다니, 얼마나 바보같은가. 아쉽게 떨어진다 해도 열심히 과제를 준비했던 기억이 나중에 다른 프로젝트를 할 때 돋움판이 되어줄 것이다. 만들어놓은 미니스튜디오로 다음에 멋진 사진을 찍을 수도 있을 거고, 하다못해 과제를 위해 기획했던 메뉴 레시피로 출출할 때 맛있는 비빔국수를 말아먹을 수도 있다.
만약 열심히 과제를 했던 시간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나 행운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과제를 하면서 내가 즐거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요리를 하느라 부엌부터 거실까지 엉망으로 만드는 게 재밌었고, 내가 만든 음식을 그렇게 맛있게 먹어 봤던 게 참 오랜만이라 행복했고, 과제를 다 끝마친 다음 시원한 맥주 한 잔 하면서 마음이 아주 편안했다. 그걸로 충분하다.
...라고 의연한 척 글을 마쳤지만, 사실 꼭 붙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코펜하겐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긴 비행에 지쳐 몸을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다 잠들고 싶고요, 기내식 치킨으로 받아놓고 맛 없다며 ‘비프로 받을 걸...’ 후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