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만들까?"
먼저 왜 남미로 떠났었는지에 대해 말해야할 것 같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심한 무기력증에 빠졌다. 앞으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수 있는지를 몰라 괴로웠다. 텅 빈 하루를 꾸역꾸역 보내고 밤이면 뜬 눈으로 지새다 새벽이 돼서야 잠이 들었다.
여섯 째, 파도가 물러가는 소리. 녹음의 절정의 순간으로, 큰 파도가 요란하게 모래를 쓸어 가다가 새로운 파도와 뒤섞일 때까지의 소리를 마이크가 매우 가깝게 쫒은 듯 하다. 마리오가 내리 쏟아지는 파도 옆을 달리다가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끼리 절묘하게 섞이는 것을 녹음했을 수도 있다.
여느 때처럼 빈둥거리다 손에 잡힌 소설 한 권을 읽었다. 그 속에 묘사된 파도소리에 매료됐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이 소리를 들으러 가야겠다
소설의 배경이 된 마을이 칠레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남미로의 여행을 생각하게 된 거다. 여행을 다짐하고 나니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행 준비를 하고 자금을 모으는 것만으로 텅 비었던 하루가 꽉 채워졌으니까. 바쁜 일과를 마치고 '나는 할 일이 있는 사람이야!'하는 뿌듯함에 잠들곤 했다. 진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쫓기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준비부터 여행까지 거의 1년여의 여유를 벌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유명한 여행 작가가 되어 남미에서 돌아온 뒤에도 강연을 하고 인세를 받으며 더 편안하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소설 속 파도소리를 듣고 싶어 다짐한 여행이었지만 어느새 지금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자리했다. 그런 온갖 마음들 모두 배낭에 고이 싸서 남미로 떠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생각처럼 다 되진 않았다. 나는 유명해지지 않았고, 여행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연락은 한 통도 오지 않았고, 연단에 서서 마이크를 잡을 기회도 없었다. 내 여행이 유달리 대단할 게 없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느낀 바가 있는데 그걸 세상에 전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독립출판을 하기로 했다.
어떤 책을 만들까?
사진집이나 에세이집은 싫었다. 사진은 카메라의 자동모드에 의지에 셔터만 누르는 비전문가이니 절대 안될 일이었고, 글이야 제법 쓰는 편이지만 내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읽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문득 어떤 순간이 떠올랐다.
볼리비아의 산 속 마을에 텐트를 치고 잤던 날이다. 저녁을 부실하게 먹은 터라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바깥에선 비바람이 텐트를 마구 뒤흔들었다. 애써 눈을 감으니 어디선가 커다란 노래 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트레킹을 함께 한 가이드가 밤에 시끄러울 거라 귀뜸해줬던 그 종교집회인 듯 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함성은 울음 소리로 바뀌었다. 비바람도 점점 더 세차게 불어왔다. 텐트 속에 있어도 두드리는 빗소리에 온통 비를 맞는 것 같았다. 순간 무슨 생각이었는지 수첩을 꺼냈다. 머리 위 달아뒀던 라이트에 불을 켜고 지금의 기분을 써내려갔다. 별 거 없는 트레킹을 마치고, 비바람에 쓰러질 것 같은 텐트 속에 누워, 종교집회의 알 수 없는 비명소리를 듣고 있는 지금. 대단한 풍경을 본 것도, 가슴 벅찬 경험을 한 것도, 오래 그리던 이를 만난 것도 아니지만 바로 지금이 가장 생생한 여행의 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내 여행을 특별한 것처럼 포장해 남들에게 자랑하려고만 하던 나에게 그 순간은 살아있는 자극이었다. 다른 이들의 관심과 평가에 상관없이 나 자신의 존재와 그 순간의 기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 이 느낌은 절대 잊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이렇게 소소한 순간의 기분을 책으로 엮어야겠다. 여행은 그렇게 거창하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해야겠다.
다시 그 날의 밤, 머리 위 라이트가 정신 없이 흔들렸다.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칠 생각 없는 비바람과 종교집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밤, 수첩 귀퉁이를 잡고 무턱대고 썼던 문장이 있다.
"커다란 가방을 샀다. 이름을 써보자. 불리고 싶은 그 어떤 이름이라도 좋다."
2016년 10월 출간된 책 <POSTCARD>의 첫 문장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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