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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 Jan 19. 2017

나의 독립출판 이야기 04

"여행의 감상을 손글씨로 담아내기"

(3편에 이어)

  책에 들어갈 내용을 추릴 때, 의도적으로 여행의 소소한 장면만을 골랐다. 여행을 하며 거창하고 화려하고 벅찬 때도 많았지만 내 마음에 남은 생생한 기억은 대부분 특별할 것 없는 순간에서 왔기 때문이었다. 해서 주로 일기장에 썼던 문장, 혹은 덜컹 거리는 버스 안에서 노트에 끄적였던 감상을 가져와 원고를 쓰게 됐다. 또, 의도적으로 주어를 대부분 생략하거나 '당신'으로 썼다. 독자가 자신이 여행하며 쓴 일기장이나 메모를 들춰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삽화작가의 초기구상안. 손글씨가 완성되지 않았던 때라 기성폰트를 넣었다. 기성폰트로는 담을 수 없는 느낌을 원했기에 손글씨를 택했다. (그림: 이희정)


  그렇게 원고를 쓰다보니 이 문장들을 손글씨로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히 들었다. 그림 작가가 손으로 그린 삽화와 함께하려면 더더욱 기성폰트보다 손글씨가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우선 내 손으로 원고를 써봤다. 첫 문장을 채 마치기도 전에 생각이 섰다.

  '아 내 글씨로 쓰면 영 볼 게 못되겠구나'

  바로 손글씨를 써줄 사람을 찾아나섰다. 사실 처음에는 그냥 손글씨만 제공해줄 사람을 원했다. 글씨를 스캔해서 선을 따고 삽화 위에 얹는 일은 내가 하면 되겠지, 안일하게 생각했다. 거기에 디자인 감각과 더불어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등 편집툴 사용능력 등이 요구되리라고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친언니의 가까운 친구였던 신수정 작가와 함께하게 되면서 이 부분을 가뿐히 넘길 수 있었다. 콘텐츠 디자이너인 그는 디자인 감각은 물론이고 여러 편집툴 사용능력도 갖춰, 책 작업을 하는 데에 큰 역할을 맡아주었다.



  손글씨를 쓰고 삽화에 더하는 작업을 위해 삼작가 사이에 긴밀한 협업이 필요했다. 우선 책의 컨셉과 주제를 셋 모두 통일된 내용으로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해서 셋이 함께 모이는 첫 회의 때 내가 만든 기획서를 가지고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손글씨 작가의 손글씨 스캔 원본. 내가 원하는 느낌을 찾기 위해 작가를 많이 괴롭혔다. (손글씨: 신수정)


 여러 글씨체로 원고의 몇 문장을 써보고 책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글씨체를 정하기도 했다. 소위 '똥손'이 보기에 참 신기하게도, '금손'인 신수정 작가는 손글씨를 이모저모로 조절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자음을 더 작게 해주세요', '몽글몽글(?)하게 써주세요' 따위의 까다롭고 추상적인 주문을 하는 호사를 누렸다.

  삽화와 손글씨가 동일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는데, 그림작가와 손글씨작가 두 사람이 내가 낄 틈도 없이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이 부분을 조율해나갔다. 어떤 펜을 사용할지부터, 삽화의 어느 공백에 손글씨를 넣을지, 삽화를 어떤 식으로 수정하면 좋을지까지. 작업이 진전될수록 더욱 원활하게 의견을 나눠준 두 작가 덕분에 큰 문제 없이 전체 작업을 이어갔다.



초고의 내용으로 만들어 본 삽화와 손글씨 합성. 지금봐도 초고는 참 쓸데없이 길었다. (그림: 이희정 / 손글씨: 신수정)

 

 출간된 책은 글이 대체로 짧고, 아예 글 없이 삽화만 들어간 페이지도 있다. 하지만 초고는 사뭇 다르다. 임의로 날짜를 설정해서 소제목처럼 썼고, 내가 정리한 여행 정보도 중간 중간 있었다. 또, 여행 중 Yeong Traveler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간간히 올렸던 글을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해서

'Yeong Traveler의 이야기 中'이라는 말을 붙여 책에 넣으려고도 했다. 한 마디로 길고 정신 없었다. 글을 쓰면 늘 장황해져버리는 내 고질병 때문이리라. 손글씨 작가가 초고를 가지고 작업을 해보니, 이거 안될 일이었다.



욕심껏 에세이까지 넣었던 초고. 삽화를 온통 가려 없느니만 못했다. (그림: 이희정 / 손글씨: 신수정)


  기본 원고 내용과 여행 정보, Yeong Traveler의 에세이는 모두 화자가 달랐다. 기본 원고는 '당신'으로 불리는 독자의 이야기이고, 여행 정보와 Yeong Traveler의 에세이는 '나'라는 특정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때문에 하나의 글씨체로 써버리면 구분도 가지 않고 묘하게 이상했다. 손글씨 작가에게 화자에 따라 두 세 개의 다른 글씨체로 원고를 써달라고 해봤지만 신통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지난 일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학과 공연에 각색 및 작사가로 참여한 적이 있다. 고전 비극을 음악극으로 각색한 공연이었다. 한창 연습을 하던 어느 날, 연출을 맡은 친구가 내게 임무를 주었다.

  '대사를 줄여라'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 문장씩 읽어보면 모두 꼭 필요해서 써넣은 대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출자의 의지에 따라 대사를 가능한 많이 줄이고 보니 느껴졌다. 전하고 싶은 내용을 주절주절 다 이야기하기보단, 한 마디를 툭 던져놓고 그걸 듣는 사람이 빈 곳을 채워넣을 수 있도록 하면 더 멋지다는 것.

  여행의 감상, '나'라는 개인의 여행기, 여행 정보까지... 모두 담는 건 욕심이었다. 결국 여행기와 여행 정보는 빼고, 여행의 감상을 담은 글도 탈탈 털어 간결한 문장만 남겨놓았다. 이미 기존 원고로 잔뜩 작업을 해두었던 손글씨 작가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도 충분히 이해해주었다. 독립출판 프로젝트가 끝으로 달려갈수록 원고를 줄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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