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사랑을 되찾기 위하여 시작할 것들
책, 음약, 미술 등 인간의 창조적 작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일반 사회에서 우리가 만나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보다 훨씬 공격성이 약하다. 이들은 '내가 왜 이 작품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주로 이야기할 뿐, '내가 이 작품이나 창작자를 싫어하는지'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일반 사회보다 '감사'와 '기쁨'과 '소박한 행복'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사랑하는 나를 발견한다. 비난하고, 공격하고, 서로를 짓밟는 사회 분위기에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트라우마_함께한다면 이겨낼 수 있는 그것
"혼자 견디기에 버거운 수많은 짐을 짊어지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 말이 왜 그토록 서글펐을까.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나 자신의 삶을 애도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도라는 말에는 단절의 의미가 있다. 힘겨웠던 그 시간을 견뎌낸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자신을 애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그것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언젠가는 활짝 피어나는 봄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줄기차게 싸워왔던 나는 어느 날 깨달았다.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사람보다 이제는 내가 훨씬 강해졌음을.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강인해졌음을. 과거에 나를 괴롭혔던 그 누구보다도 내가 더 강하고 지혜로우며 씩씩해졌음을.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있어야 힘을 얻는 존재라는 것을 눈물 속에서 깨달았다. 우리 함께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언어 속에서 힘을 내기로 하자. 수업이 타인에게 실망할지라도 우리는 혼자선 자신을 위로할 수는 없는 존재이며, 타인에게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이 위로가 되나요?
아빠를 잘 보내 드리고 싶었다. 여전히 많은 후회가 남는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 정도 여한도 없이 부모를 떠나보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사랑했던 만큼 누구에게나 작별을 안타까운 거라고.
이제는 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가 가장 행복해하는 것을 함께 좋아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작가의 무덤_단테의 무덤에서 천국, 연옥, 지옥을 경험하다
그렇게 자신을 향한 혐오를 부지런히 키워가고 있을 때, <신곡> 속 문장을 다시 만났다. "나는 행함으로써 패배한 것이 아니라, 행하지 않음으로써 패배했다." 너무도 뼈아픈 자기 진단이었다. 뭔가를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습관은 여전히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깐 오늘 하루가 엉망진창이고 결핍투성일지라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내 삶이라는 큰 그림에 이어 붙이면, 언젠가는 그 깨진 모서리들이 아름다운 윤곽선이 되어 광대한 삶과 사랑이라는 모자이크를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힘들고 지치고 쓸쓸한 그래요, 일단 오늘을 버티자. 오늘을 버틸 힘만 있으면 우리에겐 희망이 있으니까.
오늘은 버티자, 작고 소중한 기쁨과 즐거움도 발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