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물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식기와 수저를 1차로 물에 불린 후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하나하나 닦고 뜨거운 물로 마무리 샤워까지 싹 시킨다. 차곡차곡 선반에 올린 후, 설거지하는 동안 여기저기 튄 싱크대 주변의 물과 음식 찌꺼기들을 행주로 싹 닦는다. 싱크대 안 하수구 안에 남겨진 음식물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고, 하수구 통 곳곳을 깨끗이 닦은 뒤 뒤집어서 말려둔다. 끝이 아니다. 싱크대 내부를 칫솔로 싹싹 닦는다. 꼭 짠 행주로 식탁 위까지 깨끗이 훔친다. 아직도 남았다. 행주를 털어 전용세제로 빨고 식기 건조대에 고무장갑과 함께 빨래집게로 꽃아 둔다. 그제야 비로소 설거지의 행위가 완료된다. 한 끼 식사분의 설거지가. 이 일련의 작업을 엄마는 매일 삼시 세끼, 사십 년이 넘게 해오고 계신 거다. 그리고 삼일에 한 번, 행주, 수세미, 도마,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열탕 소독까지 해 오고 계신다.
"엄마, 진짜 설거지하는 게 좋아?"
"응, 말끔하게 닦인 그릇들 보면 시원해, 식기세척기 쓰는 것보다 내가 하는 게 더 빠르고 기분도 좋아."
엄마는 진심이었다.
#엄마의 시크릿 노트
비공식 살림의 여왕이자, 우리 가족 주치의로 활동 중인 엄마.(물론 의사면허는 없다.) 엄마는 글쓰기도 아주 오래전에 시작하셨다. 언제부터인지 엄마의 화장대와 티비장 위에는 아기자기한 수첩과 공책들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소불고기 양념 황금비율, 간장닭조림 황금레시피, 오징어볶음 양념, 명란 순두부 달걀찜 만들기, 궁합이 잘 맞는 음식, 공복에 먹으면 안 되는 음식, 공복에 꼭 먹어야 하는 음식, 체질별 맞춤 레시피' 등이 엄마의 손 글씨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레시피만 몇 권이었다. 엄마의 최애 프로그램, EBS 최고의 요리비결, 알토란에서 보고 적어놓은 내용들이었다. 그곳에는 아빠와 나, 동생의 체질에 맞는 음식뿐 아니라, 엄마의 두 사위들과 손주들에 대한 이야기도 쓰고 계셨다.
11월 25일, 슬초브런치 오프라인 모임 날,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꼭 참석하고 싶어 이리저리 짜 맞추다 결국은 엄마 찬스를 쓰게 되었다. 그날 아침은 친정의 김장 날이었기도 했는데 돕지도 못하고 부탁만 드리게 되어 너무 미안한 날이었다. 엄마는 정말 한결같다. 어렸을 때나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엄마가 필요할 때는 만사를 제쳐두고 그저 달려와준다. 엄마는 김장도 금방 끝났고 애들도 잘 있으니 마음 편히 놀고 오라며 연락까지 주셨다.
늦은 저녁, 집에 돌아오니 이렇게 맛있게 생긴 불고기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딱 우리 엄마의 요리다. 정성, 사랑과 애정의 집합체. 엄마의 시크릿 노트 한쪽에 적힌 '소불고기 양념 황금비율'로 제조한 궁중떡볶이는 우리 행복이, 사랑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이기도 하다.
사랑해 마지않는 엄마의 파래전과 김치, 유지어터인 딸을 위해 통밀가루, 새우가루와 참지액젓을 넣어 바삭하고 고소하고 감칠맛 터지는 파래전과 수육이랑 함께라면 무한대로 들어가는 엄마표 겉절이. 뭐든 먹고 싶다면 뚝딱 만들어내는 엄마의 시크릿 식탁.
#할머니의 사랑은 반찬을 타고
한 발 앞선 엄마의 밀프랩(Meal-Prep._3일에서 5일분 정도의 식사를 미리 준비해 냉장고에 넣은 뒤 식사 때마다 먹을 수 있게 한 것). 오이, 파프리카, 방울토마토, 양배추 등 각종 야채를 소분하여 식사 시 꺼내어 먹는데 아주 편하고 다양하게 섭취할 수 있어서 좋다. 결혼 전 부모님과 같이 살 때부터 항상 먹던 습관이라 결혼한 이후에도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먹고 자란 행복이, 사랑이도 야채들을 잘 먹는다. 어느 날 우리 집 식탁을 본 이웃 언니는 파프리카를 더 달라고 하는 둘째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이후 언니네 식탁에도 오이와 파프리카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행복이, 사랑이는 외할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5대 영양소가 골고루 함유된 반찬을 협찬해 주시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특히, 첫 손주인 행복이를 엄마는 온 힘과 마음을 다해 돌봐주셨고, 정 많고 따뜻한 행복이도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다. 용돈 한 푼이 소중한 11살 행복이가 여행을 갈 때마다 본인의 용돈으로 외할머니 선물을 사서 드린다.
내가 한 것도 있지만 엄마가 해주시는 반찬들 덕분에 더욱 풍성하다.
훈육으로 시작했다 결국은 감정적으로 폭주해 버리고 말았던 날, 엄마의 역할과 책임이 유난히 버겁게 느껴지는 날, 내 자유와 내 욕구가 중요한 나인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짜증이 날 때, 한가득 쌓인 설거지거리에 식기세척기 돌리는 것조차 귀찮을 때, 그런 모든 순간에 엄마 생각이 난다. 우리 애들은 나에 비하면 정말 양반인데 말이야... 엄마 속 엄청 썪이고 사춘기 때 말대꾸도 많이 했었는데... 어떻게 큰 소리 한 번 안 내시고 여태껏 그리 키우셨을까, 엄마는? 어디서 그런 정신력과 인내심을 얻으셨을까...? 오늘따라 엄마가 더 대단해 보인다.
'엄마 내 엄마로 와 주셔서 정말 정말 고마워요, 엄마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