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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떡볶이에서 비롯한 어떤 절연(絕緣) (2)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어

by 아름다움

https://brunch.co.kr/@beyonce1983/48



열네 살 소녀가 겪게 될, 아주 고통스러운 어떤 절연에 대하여.

여전히 흔들리지만 조금은 견고해진, 마흔한 살의 아줌마가 꼭 전해 주고 싶은 그 두 번째 이야기.





십 대의 우리는 8명에서 10명, 그 후 몇 차례 멤버들이 오고 나가며 어느 시기에는 5명으로, 마지막에는 4명으로 정착했다. 한 동안은.



#미운 입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N은 공격적이거나 때때로 빈정거리는 말투로 비호감이 되었고, 친구들은 멀어져 갔다. 분명 잘못은 N이 한 것 같은데 피하는 건 우리였다. 당시의 소녀는 무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우리는 강당에 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서 뭐지 하니, N은 기다렸다는 듯이 '너 냄새 아니야? ㅋㅋㅋ' 이번 타깃은 나였다. 거울을 봤다면 내 표정은 굳어 있었겠고 얼굴은 붉어져 있었겠지. 열일곱이 된 소녀는 '야, 내가 너한테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기분 엄청 나빠. 앞으로 말 조심해!'라고 되받아칠만한 그릇은 여전히 못 되었으며, 그저 상한 마음만 바라볼 뿐이었다.



사소해 보이는데 기분은 묘하게 상하는 이벤트들이 쌓여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서로가 서로의 초밀접자로 지내오며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 생일, 연애, 출국 귀국, 입사와 퇴사,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날들인 결혼과 출산까지... 열네 살 이후의 삶에서 모든 특별한 날들은 물론, 소소한 일상까지 나누며 추억과 함께 사진도 나날이 쌓여갔다. 추억과 사진이 축적됨과 비례하여, 함께 보낸 20여 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이 훗날 얼마나 큰 상처와 멍울로 돌아올지 소녀는 감히 가늠하지조차 못했다.





#난 지금 포.장.마.차.에 가고 싶다고

대학교, 직장 생활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한, 이제 이십 대 후반이 된 소녀는 N과의 관계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쌀떡볶이 먹고 싶어.'는 말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편치 않던 속마음을 상대에게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N은 늘 그렇듯 원하는 건 거침없이 이야기했고, 그날도 그랬다. 우리는 분명 홍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N은 갑자기 아현동 포장마차에서 오돌뼈를 먹어야겠다고 했다. 주저하던 우리에게 자기는 갈 거니 알아서 하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결국 우리는 뭐, 함께 아현동으로 향했다.





#아시타비(我是他非)_'같은 사안도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뜻을 한자로 번역해 새로 만든 신조어로, 2020년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이다.


N을 통해 알게 된 남자와 Y가 사귀면서 N의 불만은 커져갔다. 자기가 소개해 준 모임인데 Y가 주도적인 그 꼴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뭐든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N은 반대의 상황에서는 정확히 '내로남불'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 사이 나는 해외로 연수를 떠났고 그곳에서도 좋은 한국분들을 만났다. 거기에는 경상도 오빠들도 있었는데, 무뚝뚝해 보였지만, 진국인 사람들이었다. 무심한 듯 잘 챙겨주고, 재미있는 모습에 인간적으로 참 좋아했었다. 귀국 후, 그들의 초대를 받아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고, 3일로 계획했던 여행은 하루를 더 연장할 만큼 즐거웠다. 여행기간 내내 경상도 사나이들로부터 더없이 극진한 대접을 받아 마지막 날 친구들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 우리는 다 같이 어울리는 시간이 늘었고, 그 사이 N은 그 경상도 사나이 한 명(K)과 사귀기 시작했나 보다. 내게는 결혼식 일정을 잡은 뒤에야 급하게 얘기를 꺼냈기에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정확히 그 사이사이, 나의 연애나 일상을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알게 되면 서운해하며 꼬치꼬치 캐묻던 N이었기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지? 얘?' 매일 만나다시피 한 그 기간에도 N은 K와의 연애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N이 내 입장이었을 때 Y의 행동에 대노하며 욕하기 바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째튼, 나는 N의 결혼식장에 있었고 깨달았다.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그래도 한 때 친구라고 불렀던 N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주지 못한 나의 못난 마음을 한동안 자책하기도 했었는데, N의 만행과 인성 덕에 일말의 미안함 없이 깨끗이 씻어낼 수 있었다.


그 후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하며, 엄마가 되었으니 더 성숙해졌으리라 오해를 하며, 묵은 감정들은 대충 묻고 외면하며 만남을 이어갔지만 날이 갈수록 확고해졌다.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고. 시기와 질투는 파괴적인 관계로 이어질 뿐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심을 한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내 안에서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해소되지 않은 불편하고 묘하게 기쁜 나쁜 감정들은 쌓여갔고, 속내를 표현하는데 서툴렀던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나를 그렇게 만드는 상대를, 나로부터 아예 싹둑 끊어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엄청한 후폭풍이 몰려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해내야 했던 과업이자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1% 라도 모자랐다면 너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가고 있겠지. 다행스럽게 차고 넘치게 주어서, 화장실조차 친구와 같이 갔던 유약하고 관계 의존형의 내가, 절연이라는 인생 최대의 두려운 선택을 할 수 있었어. 부재중으로 온 전화를 확인했을 때도 마음이 약해질 뻔했고, 정말 많이 변했다는 말에도 넘어갈 뻔했는데 말이야, 너와의 연을 끊음으로써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 되었어. 사람 보는 눈을 얻었거든. 응큼하게 뒤통수 치는 인간, 시기질투에 눈먼 인간, 상대를 아주 묘하게 지속적으로 배려하지 않는 인간, '나는 되고 너는 안 되는' 말도 안 섞을 인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어.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정말 없나 봐. 죽을 것 같이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심지어 비참하기까지 했던 시간들을 버텨보니 이렇게도 잘 살아지네. 너만 떼어지는 게 아니어서, 내 십 대와 이십 대의 거의 전부가 잘려나가는 상실의 시대를 보냈거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어. 다정하고 아껴주는 남편, 사랑이 넘치는 가족, 세상에서 가장 예쁜 행복이와 사랑이까지...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데 그깟 인연 하나 손절한 게 그리 큰 일이냐는 시선에 대답할 수 없었거든. '제게는 정말 큰 일이었어요.'



나는 이제 내가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해.

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복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해.

나는 부러운 상대를 진정으로 응원하고 축하해, 그리고 그들의 좋은 점을 배우려고 해. 그러니 서로 사랑하고 아껴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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