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길어져, 이 이야기는 후속 편으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떡볶이
오늘도 우리는 말캉하고 졸깃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의 밀떡볶이를 먹으러 간다. 떡볶이집을 고르는 단계의 대화는 없었다. 건너편 시장에서 파는 쌀떡볶이가 유독 당기던 날에도 밀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14살의 소녀.
소녀는 고추장에 물엿을 넣고 푹 졸인, 저녁 즈음해서는 팅팅 불기까지 했던 학교 옆 시장의 두툼한 쌀떡볶이를 참 좋아했다. N은 떡볶이 취향까지 확고한 밀떡 파였고 본인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 또한 확실했기에, 관계 의존적인, 호불호 없이 '호(好)'만 있던, 갈등을 회피하는 데는 탁월했던 소녀는 '응, 좋아.'라며 따라나섰다.
#비 오는 어느 날
얼마 전 등록한 학원에 가는 날인데 비가 주룩주룩 퍼붓는다. 날씨도 흐리고 컨디션도 살짝 다운이지만 아무 이유 없이 학원 수업을 빠질 수는 없다. 집 전화가 울린다.
"소녀야, 뭐 해? 놀 수 있어?"
"지금? 나 학원 가. 새로 등록한 거기."
"가지 말고 나랑 놀자."
"응...? 엄마, 아빠 알면 화 내실텐데."
"학원 간다고 하고 나오면 되지. 0시에 00에서 만나, 알았지?"
"아.. 그게.."
뚜-뚜-
전화가 끊겼다.
'안 될 것 같아, 오늘은 학원에 갈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라는 말은 입 속에서만 맴돈 채 상대에게 전하지 못했다. 14살 소녀는 그런 아이였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소녀는, 거절을 유독 힘들어했다. 둥글둥글하고 상대의 의견에 잘 따르니 친구들은 소녀를 편하게 생각했고 그런 소녀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결국 N이 정한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는데 근무를 마치시고 돌아온 아빠와 마주쳤다. 능숙하게 둘러대지 못하는 소녀는 학원 수업 대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임을 실토했고, 아빠는 그런 이유로 수업을 빠지면 안 되고 비도 오니, 학원에 직접 데려다주셨다.
학원 입구에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굉음이 들렸다. 꽝!
아직 뒤를 돌아보기 전인데 심장이 쿵쾅거리고 조여드는 느낌이 왔다. 무슨 소리인지 정체도 모르는데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뒤를 돌아 눈으로 재빨리 소리를 따라갔다. 은색 승용차 운전석에서 중년 남자가 나온다. 남자의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아빠다... 우리 아빠. 아빠 머리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다. 2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이 장면은 또렷이 기억난다. 피를 본 순간부터는 시야가 흐릿해지며 도로의 움직임들도 희미해졌다.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차 앞에는 OO제과 트럭이 있다. 불법 유턴을 하다 아빠 차와 충돌한 것이다.
병원 침대에 누워계신 아빠, 전화받고 달려오신 엄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 이 상황에서도 마음 한 편에는 N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아직도 뒤돌아서서 처음 마주한 아빠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얼마간은 조수석에 타기도 어려울 만큼 아빠의 차사고는 치명적이었다. 이 글을 빌어, 아빠께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빠, 정말 너무너무 미안했어."
이 이후에도 정말 많은 일들이 N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는데, 이 일련의 사건들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굳이 명명을 해야 하는 이유도 없고, 많이 단단해진 지금의 나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아니지만, 14살의 나처럼 나약하고 줏대 없고, 많이 흔들리고 영향받는 소녀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거절해도, 너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해도, 불편하다고 말해도 괜찮아. 너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일이 일어나지 않아. 설사 그와의 인연을 유지하는데 걸림돌이 생기더라도 무리해서 지켜나가는 것보다 '너의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이걸 명명하기로 했다. 사건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어두웠고, 에피소드라 칭하기엔 너무 가볍고 경쾌하니, 이벤트라고 부르기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 오래된 관계에서 여겨지는 나, 새로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 어떤 이에게 불려지는 나, 그 사이의 괴리와 틈이 커져가는 시기에 책을 만났다. 정말 신기하게도 책들은 딱 내가 원하는 만큼의 위로와 공감을 보내주었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렇게 읽다 보니 내 마음속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조각들을 분류라도 하고 싶었다. 일렬로 정리로까지는 못하더라도.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던 얽히는 관계가 있었다. 이 관계에 대해 써내야, 엉켜져 있던 실타래가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