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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May 26. 2017

다른 시간에, 언젠가는

빌 에반스와 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하여

잘 연주된 재즈를 들을 때와 잘 쓰인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같은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은 그 형식이 어떤 것이든 가장 순수한 감정을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내게는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연주를 들을 때와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읽을 때가 그런 순간이다.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내가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작품이 현실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약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예술을 바탕으로 '이곳 너머'로 향했다.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지금 여기'를 넘어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곳 너머'를 향한 그들의 여정의 발자취를 통해 우리는 '이곳 너머'를 넘는 한 순간을 엿볼 수 있다. 그곳을 엿보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술에 매료되고 다시는 그 작품을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비가역적인 엿봄의 순간을 겪고 나서 나는 빌 에반스와 스콧 피츠제럴드의 세계에서 돌아올 수 없었다.


피아노로 쓰는 시

Bill Evans - <Some other time>

빌 에반스를 들으면, 마치 피아노로 쓴 시를 읽는 기분이 든다. 그의 연주는 무척이나 명상적이면서도, 무엇보다 자유롭기 때문이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빌 에반스의 연주에 대해 극찬을 했는데, 그가 표현하기를 빌 에반스는 "반드시 연주되었어야 하는 연주”를 했다. 그가 누르는 건반 하나하나는 모두 그의 진실한 감정으로부터 귀결되는 하나의 정답이었다. 그 순간 반드시 눌려야 하는 건반, 다른 순간 반드시 떼어져야 하는 건반, 빌 에반스는 연주의 매 순간 가장 아름답고 자유로운 음을 선택하는 피아니스트였다.


빌 에반스의 곡들 중에서도 가장 시에 가까운 곡을 고르라면, 나는 <Some other time>이라는 곡을 고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주가 지난 뒤 처음 5초 동안은 피아노 건반을 통해 빌 에반스가 조용히 속삭이는 느낌마저 든다. 그는 연주를 통해 '다른 시간에, 언젠가'를 그린다. 그렇다면, 그가 그린 '다른 시간'과 '언젠가'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빌 에반스의 삶을 망친 것은 마약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는 헤로인을 했고, 1970년대에는 코카인에 손을 대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의 친구 진 리즈가 빌 에반스의 약물 중독을 "역사상 가장 긴 자살"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은 망친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슬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헤로인 중독이 심해진 이유는 1961년 그의 동료 더블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Scott LaFaro)의 죽음이 결정적이었다. 스콧 라파로의 죽음 이후 수개월 동안, 빌 에반스는 스콧 라파로와 함께 연주했던 <I Loves You Porgy>를 강박적으로 연주하는 것 이외에 수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 1979년 그의 형 헤리 에반스의 자살은 그를 결정적으로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의 누이 팻 에반스는 빌 에반스가 형의 죽음 이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빌 에반스는 이듬해 약물 중독으로 인한 복통과 간염으로 사망한다. 빌 에반스는 형의 죽음 직후 그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으로 알려진 <We Will Meet Again>을 발표하는데, 이 앨범 안에는 <For All We Know (We may never meet again)>이라는 곡과 <We Will Meet Again>이 담겨 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언젠가, 다른 시간에 (<Some Other Time>)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We Will Meet Again>). 이곳에 남은 다른 모두에게: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We may never meet again>)" 선언과도 같은 유작 앨범으로부터 1년 후, 그는 죽는다.


아마 빌 에반스는 평생에 걸쳐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기보다는 그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지금 여기'를 평생에 걸쳐 극복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빌 에반스의 지난한 여정은 "역사상 가장 긴 자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깊게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길게 이별하는 사람이었다. 


Bill Evans & Monica Zetterlund - <Some other time>

다시 <Some other time>으로 돌아오자. 이곡은 사실 가사가 있는 곡이다. 빌 에반스는 평생 이 곡을 단 두 명의 보컬(토니 베넷과 모니카 제터룬드)하고만 연주했는데, 나는 스웨덴 가수 모니카 제터룬드와 함께 한 버전을 좋아한다. <Some other time>의 가사를 한 번 살펴보자.


Where has the time all gone to
Haven't done half the things we want to
Oh well, we'll catch up some other time
This day was just a token
Too many words are still unspoken
Oh well, we'll catch up some other time
Just when the fun is starting
Comes the time for parting
Let's just be glad for what we had
And what's to come
There's some much more embracing
Still to be done but time is racing
Oh well, we'll catch up some other time


<Some other time>은 잃어버린 시간을 노래하는 곡이다. 우리가 하기로 원했던 것은 반도 하지 못 한 채, 너무나도 많은 말들이 말해지지 않은 채로, 즐거움이 시작하려 할 때,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며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노래는 잃어버린 시간 앞에서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노래는 우리가 함께 했던 것들에 그저 기뻐하자고 이야기한다. 무엇이 올지라도, 더 넓은 것이 있다. 우리는 끝나게 될 것이지만, 시간은 흐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언젠가, 다른 시간에 우리가 바라던 순간을 따라잡을 것이다.


빌 에반스가 <Some other time>을 연주하기 위해 하얗고 검은 건반 위에 얼굴이 닿을 것처럼 몸을 기울일 때, 모니카 제터룬드가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oh, well"이라는 가사를 노래할 때, 그들은 언젠가, 다른 시간에 그들의 열망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최고의, 최선의 연주를 할 때라도 그들에게는 그 믿음이 실현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믿음으로부터 나오지, 믿음의 실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그리고 더 나아가 꿈꾸는 이들은 기약 없는 약속을 믿는 이들이다 [2].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이 미망일지라도 소망한다. "오, 그럼요.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나 근황을 묻겠죠. (Oh well, we'll catch up some other time)"


개츠비가 믿었던 초록 불빛

개츠비는 초록 불빛을, 우리 뒤로 한 해 한 해 멀어지는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 우리는 그것을 얻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상관없다.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고, 팔을 더 멀리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좋은 아침에——
우리는 물결을 맞서는 보트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는 운명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Gatsby believed in the green light, the orgastic future that year by year recedes before us. It eluded us then, but that's no matter—tomorrow we will run faster, stretch out our arms farther. . . . And one fine morning——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단락의 한국어 번역과 원문 (직접 번역)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위와 같이 끝난다. 이 문장들은 내가 온 문학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문장이다. 테크닉적으로도, 그것이 담고 있는 감정으로도 완벽하다. 개츠비는 온 생을 데이지를 사랑하는 데에 바쳤다. 그러나 사실 그가 사랑한 것은 데이지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하나의 상징이었을 뿐, 그가 사랑한 것은 강 건너편의 초록색 불빛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가 사랑했던 것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져 가는 황홀한 미래를 향해 팔을 뻗고 더 빨리 달리는("we will run faster, stretch out our arms farther") 자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겐 초록색 불빛에 닿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초록색 불빛에 닿으려고 하다가 자신이 파멸해도 상관없었다.


이왕 이 문장을 읽었으니, 이 문장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장치도 살펴보자. 문학적 장치에 대한 분석은 딱딱해서 재미없을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법이다. (1)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먼저, 그는 '오르가슴(orgasm)'의 황홀한 느낌을 빌려와 "orgastic"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Orgastic future"는 단순히 (성적) 열망, 황홀 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츠제럴드가 "orgastic"이라고 표현했을 때의 감정은 동물적인 황홀의 감정인 오르가슴을 넘어 초월적인 무언가를 가리킨다. (2) "And one fine morning——" 뒤에 붙은 긴 하이픈("——")으로부터는 초록색 불빛에 대한 열망과 아쉬움, 그리고 개츠비의 비극적인 운명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3) 그런가 하면, 같은 문장 안에서도 시제와 주어가 두 가지로 변화한다. "개츠비는 초록 불빛을, 우리 뒤로 한 해 한 해 멀어지는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라는 문장이 시작될 때 주어와 시제는 각각 '개츠비'와 과거 시제였다가 ("Gatsby believed in the green light"), 문장이 마칠 때 '우리'와 현재 시제로 바뀐다. ("the orgastic future that year by year recedes before us.") 이 문장이 지나고 나면 주어와 시제는 계속 '우리'와 현재 시제로 유지된다. 이 순간 개츠비의 이상은 우리의 이상이 된다. (4) 마지막 문장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을 소리 내어 읽으면, 약한 악센트를 가진 단어 뒤에 강한 악센트를 가진 단어가 배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이앰빅(Iambic)'이라고 불리는 영시의 테크닉인데, 문장을 읽을 때 "da-DUM-da-DUM-da-DUM"하는 식으로 약과 강이 반복되는 리듬이 느껴진다 [2]. 아이앰빅이 쓰인 문장은 심장 박동을 닮았다. 두근, 두근하는 식으로 약강의 악센트를 가진 시어가 반복된다. (5) 또한, 'beat-boats-borne-back'처럼 b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나열되다 입술 끝에서 부딪히는 p의 단어인 'past'로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서는 한편의 짧은 음악을 듣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껴진다. 심장 박동을 닮은 마지막 문장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라는 선언과 함께 엄청난 문학적 효과를 발휘한다. 마치 온 힘을 다해, 심장이 터질 듯이 애써가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끊임없이 뒤로 밀려가는 느낌.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개츠비와 닉이 느꼈던 감정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다른 시간에, 언젠가는

빌 에반스의 <Some other time>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기이한 지점에서 만난다. 기약 없는 약속에 대한 믿음이 빌 에반스와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낳았다. 1896년에 태어나 1940년에 죽은 스콧 피츠제럴드와 1929년에 태어나 1980년에 죽은 빌 에반스가 서로 접점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생존 시기가 다소 겹치기는 하지만, 둘이 직접 영향을 주고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빌 에반스는 1950년대 중반이나 돼야 뉴욕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했으므로, 스콧 피츠제럴드는 빌 에반스의 음악을 들을 길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빌 에반스가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빌 에반스가 피츠제럴드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들 모두를 아는 우리에게는 흥미로운 상상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Some other time>와 <위대한 개츠비>는 같은 정서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사랑하고 갈망하는 무언가를 다른 시간에,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리고 그 희망으로부터 역사상 최고의 예술이 돋아 났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빌 에반스나 스콧 피츠제럴드와 같은 성취를 이루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들의 예술적 성취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도 같기 때문이고, 그와 같은 산봉우리를 선 자리에 세우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바보처럼 믿는다.


우리는 만날 것이다. 다른 시간에, 언젠가는.



[1] https://en.wikipedia.org/wiki/Scott_LaFaro#Death

[2]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은 모두 예술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3] Anna Wulick, Understanding The Great Gatsby Ending and Last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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