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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May 24. 2017

이곳 너머를 그리는 모두의 이야기

<레 미제라블>과 오늘날의 진보 정치에 대하여

암흑 속에서 촛불을 들던 춥고 길었던 겨울을 지나, 정권이 교체되고 새로운 세상이 첫 발걸음을 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새 정부의 첫행보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3기 민주당 정부에겐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새로운 정부가 앞으로도 긍정적인 행보를 이어나갈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새로운 시대의 한 귀퉁이에서 우리는 우리가 겨울 내내 외쳤던 물음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정의는 무엇인가. 연대는 무엇인가. 진보는 무엇인가. 그리고, 정치는 무엇인가.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레 미제라블>을 다시 본다.


레 미제라블, 비참한 사람들과 혁명의 이야기

영화 <레 미제라블> 중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부르는 장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읽기 친절한 소설은 아니다. 빠른 호흡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매우 지루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일단 분량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총 5권인데, 각 권마다 페이지 수가 어마어마하다. 소설이 이렇게 된 이유는 소설 <레 미제라블>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혁명을 겪고 있던 당시 프랑스의 사회 곳곳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소설의 핵심 플롯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의 이야기를 수백 쪽 동안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독자는 당시 사회에서 버려진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삶을 속속들이 느끼게 된다. 그런가 하면, 뮤지컬을 영화화하여 만들어진 톰 후퍼의 영화 <레 미제라블> 또한 원작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판틴(앤 헤서웨이)이 <I Dreamed a Dream>을 부를 때, 바리케이드 위에 선 혁명가들이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부를 때 우리는 원작의 매력과는 다른 종류의 매력에 빠져 든다. 


<레 미제라블>에는 두 종류의 정치적 인물이 등장한다. "ABC의 친구들"이라는 결사체 단원들과 장 발장이다. "ABC의 친구들"의 ABC는 프랑스어로 abaissé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그 단어는 "억압받는 자"를 뜻한다. 그들은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그들의 목숨까지도 바친다. 반면, 장 발장은 사전적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바리케이드의 혁명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ABC의 친구들" 단원들과 직접적인 연관도 없다. 다만 그는 주변의 '레 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수많은 내면의 싸움을 견뎌야 했지만, 결국 그는 매번 불쌍하고 버려진 이들을 돕는 길을 택한다. 비록 그는 정치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진보 정치의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전통인 '연대'를 누구보다도 충실히 보여준 인물이었다.


정치는 지도자로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권력 구조로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와 같은 거대 담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삶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정치에 참여한다. 각자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정치에 참여하거나,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정치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간 곳에 진보 정치가 있다. 진보 정치는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이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소수로부터 찾아야만 하는 이들, 이와 같은 외면당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진보 정치의 가장 깊은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 미제라블>의 "ABC의 친구들" 단원들과 장 발장은 진보 정치의 본질의 가장 가까이 닿은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레 미제라블>이 담고 있는 진보에 대한 믿음과 연대에 대한 헌신으로부터 진보 정치의 '오래된 미래'를 본다.


진보 정치의 역사

다시 '지금 여기' 우리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보자. 지금 보려고 하는 것은 한국 진보 정치에 대한 것이다. 한국 정치의 지형은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보수정당, 민주당계 정당, 진보정당의 세 줄기로 이루어지고 있다 [1]. 사실 세 줄기의 정치 지형이라고 하지만,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이 거대한 두 흐름을 이루고 진보정당은 그 옆에서 근근이 명목을 이어왔을 뿐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진보정당의 비참한 역사 때문이다. 한국 진보 정치 역사의 다른 이름은 패배와 절망의 역사이다. 평화통일을 지향했다는 이유로 조봉암이 사법살인당하고 진보당이 해체되었고, 좌우(김일성의 공산주의 진영과 이승만, 김구의 민족주의 진영) 모두로부터 끊임없이 테러를 당하던 여운형이 결국 피격당하여 사망한 후 대한민국의 진보정당은 그 맥이 끊겼다. 그 후 수십 년의 어두운 시간을 지나,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을 하던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국민승리21이 창당되고서야 다시 진보정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봉암이 죽은 진보당 사건이 1958년이고, 국민승리21의 창당이 1997년이므로 진보정치는 무려 39년 동안이나 멈추어져 있던 셈이었다 [2]. 국민승리21의 창당 이후로도 진보정치가 평탄한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당내 노선 갈등으로 당이 통합되고 분열되기를 반복하면서 [3], 오늘날까지 두 자릿수 지지율을 얻지 못하는 '풍찬노숙'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19대 대선을 거치며, 나는 한국 진보 정치의 제대로 된 역사가 이제야 시작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자유한국당이나 민주당처럼 공고화 된 진보 정당이 없었다면, 지금부터는 우리도 어느 정도 안정된 진보 정당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대 대선에서의 심상정 대표의 활약과 대중의 반응은 진보 정당의 공고화를 상징하는 사건일 것이다. 정의당 내부에서 다소 부족한 당내 민주주의와 다소 어설픈 정당 운영에 대한 비판이 있을지라도, 과거처럼 그로 인해 당이 깨질 것이라는 불안은 없다 [4]. 60년 전, 조봉암과 여운형이 애타게 꿈꿨던 진보 정치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왜 진보 정당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진보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복지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상황에, '을지로위원회'로 대변되는 민주당의 진보적 영역 확장과 기존 진보 정당인 정의당의 진보성은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한마디로 답하자면, 정의당과 같은 진보 정당은 자유한국당과 같은 보수 정당이 한국 사회를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막고 민주당과 같은 민주당계 정당을 왼쪽으로 밀기 위한 역할을 가진다. 민주당 우상호 전 원내대표가 말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나태해질 때 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은 진보 정당의 일이다. 지난 대선 TV 토론에서의 몇몇 장면들이 왜 진보 정당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대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30년 전 봉제 노동자가 오늘날 디지털 노동자로 바뀌었을 뿐 우리의 삶은 큰 변화가 없었다고 지적하는 순간, 청년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선거 유세를 다니며 심 후보를 만나는 청년들마다 눈물을 흘리던 순간. 이러한 순간들은 왜 진보 정당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5].


오늘을 위하고 내일을 꿈꾸는, 정치

오늘날 우리에게 대화 주제로 정치를 올리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이다. 하지만 정치는 원래 우리 삶을 다루는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선언한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ζῷον πολιτικόν)이다." 사실 일상의 모든 행위가 정치일 수 있는 것이다. 정치의 어원을 들여다보면, 정치의 일상적 면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정치를 뜻하는 영단어 politics는 원래 그리스어 politika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politika는 "도시의 일"이라는 뜻이다. 당시 그리스는 도시가 곧 국가였으므로, 어떤 경우에는 politika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국가의 일"로 번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정치'가 politika의 원래 뜻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4]. 정치는 도시의 일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일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부정적인 일에 정치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식탁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나누는 것이 암묵적 금기를 깨는 일이 아니라 훌륭한 시민의 정치적 연습으로 여겨져야 한다. 반면, 사내에서 편을 갈라 자신만의 이득을 취하려는 행위에 대해 '사내 정치'라는 이름을 붙일 것이 아니라 '협잡'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 (그런 식의 협잡에 정치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정치는 너무나도 고귀한 일이다.)


수많은 생각을 가진 우리, 수많은 일에 종사하는 우리, 우리들은 각자의 이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를 통해서 우리는 각자의 이해를 조율하고, 각자에게 최선은 아니더라도 모두에게는 차선인 타협점을 찾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대화의 과정이 '이곳 너머'로 우리를 데려다줄 것이다. 정치 또한 과학이나 예술과 같이 우리가 '지금 여기'를 극복하고 '이곳 너머'를 향할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수단인 것이다.


정치의 과정은 느리다. 모두의 타협점을 찾는 과정은 때로는 힘겨운 일일 수도 있다. <레 미제라블>의 6월 혁명이 있고 나서도 민중이 자신들의 권리를 차지하는 데에는 2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치는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우리를 '이곳 너머'로 데려다줄 수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기약 없는 꿈을 그렸던 우리의 역사 속 선배들 덕분에 <레 미제라블>의 "ABC의 친구들" 단원들이 꿈꾸던 세상, 장 발장이 꿈꾸던 세상, 판틴이 꿈꾸던 세상을 우리가 누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꿈꾸는 일을 포기할 때, 정치를 외면할 때, 우리의 침묵 뒤에서 부패한 권력이 시민의 목소리를 왜곡하고 시민의 권리를 빼앗는다. 우리 사회는 수십 년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뼈저리게 확인했다. 우리의 꿈을 다른 이에게 맡기지 말자. 꿈꾸는 일은 누군가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꿈은 우리가 꾸고, 그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그러면 우리는 어느새 '이곳 너머'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꿈은 우리의 일이다.



[1] 2017년 현재 보수정당은 자유한국당과 새누리당, 민주당계 정당은 더불어 민주당과 국민의당, 진보정당은 정의당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5개 정당이 원내 정당으로 활약하고 있다.

[2] 사실 역사의 기저에서 진보정치는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을 중심으로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당장 진보당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인 정태영 박사 또한 2008년까지는 생존하여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다.

[3] 진보 정당의 분열과 통합의 역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민주노동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통합진보당→통합진보당/정의당→정의당 순이다. 통합진보당 계열 NL 정당은 정치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대중들의 인식도 매우 좋지 못하므로 당분간 이러한 흐름이 계속될 것이다.

[3] 내 사견이지만, 현재 정의당 당내에서 벌어지는 몇몇 잡음들은 당의 규모가 작다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다소 불투명한 당의 의사결정 과정으로부터 촉발된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선 국면에 접어들며 다소 조용해졌지만, 분명히 정의당이 새겨 들어야 할 문제이다. 당면한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단기적으로는 당 지도부가 당원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해야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문제는 당이 더 넓어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권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수용을 위해서는 적절한 견제 그룹이 필요하지만, 당이 작으면 견제 그룹 또한 힘을 갖기가 어려우므로 당내 민주주의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당을 위해서도, 그리고 진보 정당이 활약하여 바뀌는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정의당은 더 넓어져야 한다.

[4] 도시 국가에서 각각의 도시가 국가로 대치될 수 있다고 해서, "도시의 일"을 "국가의 일"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당시는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할 정도로 공동체의 규모가 작았으므로 고대 도시 국가와 현대 국가를 1:1로 대치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정치라는 행위 자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의사소통이 조금 더 먼 거리에서, 빠른 속도로, 대규모로 가능해졌다는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여전히 정치는 도시의 일이어야만 하고, 우리의 일이어야만 한다.

[5] 정의당이 한국 정치 지형에서 강한 정당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제한된 협상력을 가지고, 그들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폭이 제한적이라고 해서 정의당이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그 가치를 폄하당하는 일이 종종 보인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한 진보 정치의 순간들 때문에라도, 진보 정당은 반드시 한국 사회에 필요하다. 그 믿음이 진보 정당을 더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고, 그들이 한국 정치 지형에서 더 큰 활약을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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