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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May 19. 2017

물로 쓴 시를 딛고 서는 일

기형도, 유희경, 박준의 우울한 시에 대하여

우울은 세계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로부터 일어난 감정을 (감, 感) 예민하게 느끼는 (수, 受) 능력을 (성, 性) 가진 이들만이 우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수성이라는 마음의 체를 통과한 감정의 알갱이만이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다. 우울한 이들은 마음의 체가 더 성긴 사람들일 것이고, 감정의 알갱이들은 성긴 체를 지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자주 두드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만큼 자주, 그만큼 쉽게 상처받을 것이며, 그만큼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감정의 알갱이가 수없이 많이 마음의 바닥을 두드리며 시간이 흐르면, 마음에 바닥에는 아주 깊은 구멍이 생긴다. 마음의 바닥을 이루던 자갈과 돌멩이들은 감정의 알갱이와 부딪히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생긴 구멍은 절대 다시 구멍이 생기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 번 뚫린 구멍은 구멍으로 계속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울한 이들은 결핍된 이들이다. 그들은 세계 속에 무언가를 잃어버렸거나, 세계로부터 무언가를 뺏긴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구멍을 안고, 각자의 눈동자에 눈물 한 방울을 머금은 채로 살아간다. 그들이 눈동자에 머금은 눈물은 결코 그들의 뺨으로 흘러내리는 법이 없다. 눈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눈물은 마를 수 없다. 그들은 그저, 눈물을 머금고 세계 속에서, 그리고 세계 밖을 꿈꾸며 살아갈 뿐이다.


여기, 머금은 물기로 시를 쓴 세 명의 시인이 있다. 기형도, 유희경, 박준 시인은 마음의 우물으로부터 길어온 물로 시를 쓴다. 흘리지 않고 머금은 눈물로 마음속에 뚫린 구멍을 채울 때, 그들이 물을 길어갈 수 있는 우물이 생긴다. 그 우물은 그들의 결핍만큼이나 깊고, 그들의 눈물만큼이나 차다. 마음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로 쓴 시는 무척이나 습하며 서늘하다.


빈집에 갇힌 가엾은 내 사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 (전문, 1989)


기형도 시인이 남긴 마지막 시로 알려진 <빈집>이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듯, <빈집>은 상실과 작별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잘 있거라"라는 선언은 시의 앞(2행)에서 시를 이끌고, 시의 뒤(7행)에서 시를 민다. 그러나 그 선언은 그가 원해서 하는 선언은 아니다. 상황에 밀려 마지못해 말해야만 하는 "잘 있거라"일 테다. 그는 사랑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릴 처지가 되었고, 그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매달려야만 했을 것이다. 상실에 대한 공포 속에 "겨울 안개" 속 불면의 밤을 이겨내야만 했을 것이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의 곁을 밝혀주는 것은 "촛불들" 뿐이었을 것이다. 촛불들은 내 마음이 시들어가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야속하게 빛났을 것이다. 나의 고통을 "흰 종이" 위에 글자로 풀어놓고 싶지만,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내가 선택한 단어가 다시 나를 상처 입히진 않을지 "망설임" 속에서 "눈물"만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는 결국, 어떻게 하더라도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상실에 대한 절대적 무능함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잘 있거라"라고 다시 말하는 것 밖에 없다.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연거푸 뱉는 한숨 같은 한마디에선 겨울밤 안개 냄새가 난다. 축축하고 서늘한. 그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집 안에 넣어둔 채로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다. 문이 열려 있으면 뜨거운 열망들이 다시 집 밖으로 쏟아져 내려 나를 다시 상처 입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열망들은 날아다니는 종달새처럼 여전히 뜨거운데, 그 종달새들은 가엾게도 빈집 안에 갇혀야만 한다. 그 새들에게 숨을 불어넣은 사랑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문의 자물쇠는 영영 열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상실은 단순한 감정의 멎음 이상의 것이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상상한다. 사랑은 가능성의 행위다. 모든 연인이 순간의 사랑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그 순간의 사랑은 미래에 대한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너를 통해 내가 더 넓어질 것이고, 나를 통해 네가 더 넓어질 것이라는 약속. 사랑을 통해 우리는 이곳이 아닌 이곳 너머로 건너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잃을 때, 우리가 잃는 것은 사랑뿐만이 아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곳 너머에 대한 모든 약속과 가능성을 잃는다. 사랑이 무너질 때, 이곳 너머의 세계 전부가 무너져 내린다.


뒷골목에 묻은 울음소리의 자국들 

신발 끈 묶듯 모든 이별을 경험했으니
방목하던 인류애를 모두 불러
일부는 팔아먹고 병든 것들은
풀어주었다 그 계절을 이렇게 적는다
개인의 역사란 뒷골목에 묻은
울음소리 같은 것 내 주변에는 늘
비가 내렸고 장엄한 풍경이 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이든 되기를 바랐다

- 유희경, <나는 당신보다 아름답다> (2011, 일부 발췌)


'나'는 과연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내가 해낸 업적과 성취가 적힌 이력서로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시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신발에 끈을 묶을 때 우리는 발가락 끝에서 발목까지 닿기 위해 수많은 평행선을 발등 위에 그려야 한다. 하나의 연애가 이루어졌다가, 그 연애가 허물어지고, 또 다른 연애와 그 연애의 실패가 반복되는 "뒷골목에 묻은 울음소리" 속에서 나는 '나'를 정의할 수 있다 [1]. 어쩌면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연애의 성공으로부터는 달콤한 추억 이외에 그다지 배울 것이 많지 않을 수 있지만, 연애의 실패를 겪을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바닥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바닥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구멍이 있을 것이다. 그 구멍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빠져나간 흔적이다. 사랑하는 일이 이곳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일이고, 사랑이 끝나는 일이 꿈꿨던 세계가 산산이 부서지는 일이라면, 우리 마음속 바닥에 뚫린 구멍은 그 세계가 부서졌던 흔적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무너진 세계의 파편들이 우리를 정의한다. 프루스트는 모든 일이 지나고 나서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과거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잃어버린 것은 절대 다시 찾을 수 없겠지만, 프루스트가 떠난 마음속 여행의 목적은 아마도 그 자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슬픔이 자랑이 되는 일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2012, 일부 발췌)


박준 시인 또한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한다. 그는 작은 눈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던 "당신"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당신"의 부재 때문에 그는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 이를 악물어야 한다". 잃어버림 앞에서 그는 버팀의 순간과 또 다른 버팀의 순간을 이어 긴 삶을 자아내야 한다. 끝없는 버팀의 순간들을 고통의 박음질로 연달아 잇는 일은 이를 악물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는 잃어버림 때문에 그만큼 고통스럽다.


하지만, 좋지 않은 세상에서 눈물을 흘릴 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울이 세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자들의 특권이라면, 모두가 조증 걸린 사람처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홀로 멈추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눈물은 우리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구멍을 확인할 때에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속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모두가 봄을 즐길 때, 나만이 어두운 방에서 슬픔에 잠겨 있다고 비참해지지 말자. 우리는 상실이 우리를 더 깊게 만들어 줄 것이리라는 사실을 안다. 마음에 구멍이 하나 더 뚫릴 때마다, 우리는 더 깊어질 것이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우울은 세계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그들이 느끼는 그 세계는 내 밖의 세계이기도 하겠지만, 내 안의 세계이기도 하다. 내 안과 밖의 세계를 온전히 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세계의 지형의 굴곡을 누구보다도 깊게 알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이곳 너머를 그리기 위해 물로 쓴 시를 딛고 설 수 있다 [2]. 사랑을 잃고 나서 쓸 수 있는 일 (기형도), 뒷골목에 묻은 울음소리로 나의 역사를 규정하는 일 (유희경), 슬픔이 자랑이 되는 일 (박준), 이런 것들이 바로 물로 쓴 시를 딛고 서는 일이다.



[1] 어쩌면, 개인의 역사를 울음소리로부터 찾는 시도는 오늘날 청년들이 느끼고 있는 좌절감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2] 물로 쓴 시를 딛고 선다고 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딛고 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물을 머금을 것이고, 그 눈물로 우리 가슴 바닥에 뚫린 구멍을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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