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리학자 J Jun 02. 2017

저무는 시대의 초상

세기말 비엔나의 우울과 에곤 실레의 예술에 대하여

시대를 부르는 이름들이 있다. '벨 에포크', '잃어버린 세대', '대공황', '진경시대'와 같은 것들이 그러한 이름들이다. 시대의 이름들이 담고 있는 것은 시대정신일 수도, 그 시대 사람들의 소망일 수도, 아니면 단순히 시대의 분위기일 수도 있다. 물론 시대를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이 따르는 일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시대를 가리키는 단어들로부터 각각의 시대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여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는 시대의 이름을 들을 때 그 시대로 떠나는 여정을 할 수 있게 된다. '세기말 비엔나' 또한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시대의 이름들 중 하나다.


한 시대가 저물 때 태어나는 것들

슈베르트 -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2악장

19세기 말의 비엔나는 근대 유럽 역사의 특이점(singular point)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특이한 곳이었다. 유럽의 온갖 부조리가 모형화된 응축의 도시였고, 동시에 인류의 삶을 바꿔 놓은 수많은 사상과 예술과 인물을 잉태한 도시였다. 예컨대, 비엔나는

안톤 브루크너가 루트비히 볼츠만에게 피아노 교습을 해주고, 구스타프 말러가 정신적 문제로 프로이트를 찾아가고, 요제프 브로이어가 프란츠 브렌타노의 주치의일 뿐 아니라, 프로이트와 결투를 벌였던 빅토어 아들러가 그와 함께 저명한 신경학자 마이네르트의 임상진료소 조수
- 곽차섭, <[명저 새로 읽기]앨런 재닉·스티븐 툴민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중

였던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비엔나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관능적이며 매혹적인 그림을 그렸던 곳이고, 에곤 실레가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했을 무렵, 아돌프 히틀러가 같은 학교에 두 번이나 낙방했던 곳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이 시기 유럽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 대부분은 직간접적으로 비엔나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세기말 비엔나를 상징하는 사건이 '빈 체제'의 종말이다. 빈 체제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구 체제를 지키려고 한 유럽 열강들이 1814년 빈 회의에서 설계한 체제의 이름이다. 세기말 비엔나의 분위기는 이 빈 체제의 종말과 맞닿아 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부터 빈 체제는 종말을 맞고, 혁명을 이끈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 비엔나의 권력을 잡는다. 자유주의자들이 집권한 시기에 비엔나의 중심가 '링 슈트라세(ring street)'가 개발되고 비엔나의 여러 명사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문화가 꽃핀다. 그러나 그들의 누린 자유는 바늘 끝에 놓인 것처럼 불안정한 것이었다. 세기말 비엔나의 우울은 그러한 정치 사회적 불안정을 알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1]. 미래가 보이지 않고, 정치는 불안하며, 도처에서 혁명과 전쟁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결국, 1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독감이 세기말 비엔나를 덮쳤을 때, 세기말 비엔나는 물리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끝난다. 


세계와 존재의 마찰음

에곤 실레 - <죽음과 소녀>

에곤 실레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서두가 길었다. 그러나 에곤 실레의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기말 비엔나를 알아야만 한다.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시대의 우울 속에서 전재산을 불태워 버렸고, 에곤 실레는 경제적 궁핍과 자신의 예술을 외설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위선자들의 비판 속에서 괴로워해야 했다. 에곤 실레의 <죽음과 소녀>는 세기말 비엔나의 우울과 그 세계와 끊임없이 마찰해야 했던 에곤 실레의 고뇌가 녹아 있는 작품이다. 그림을 그릴 당시 에곤 쉴레는 1차 세계 대전에 징집되었고, 징집병의 생활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아내가 필요했다. 그는 징집되었더라도 그림을 그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2]. 그래서 그는 이전까지 자신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연인 발리를 버리고, 중산층 가정의 딸인 에디트와 결혼하게 된다. <죽음과 소녀>는 에곤 실레가 발리 노이질과 헤어지며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소녀와 죽음>은 에곤 실레의 작품 중에서도 특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인을 버린 그의 선택에서 알 수 있듯, 에곤 실레는 윤리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3]. 그러나 <소녀와 죽음>에서는 에곤 실레의 다른 작품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윤리적 고민을 느낄 수 있다. 남자를 안고 있는 소녀의 팔은 남자의 팔에 가려 있어 비현실적으로 가늘어 보인다. '죽음'으로 상징되는 남자에게 가까워질수록 소녀는 야윈다. 그들은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이 맺었던 관계는 한쪽의 삶을 다른 한쪽이 빨아들이는 비대칭적인 관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속 남자의 눈동자 안에는 '죽음'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미안함과 연민과 같은 감정이 묻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와 더 함께 하면 너에겐 비극적인 운명뿐이라는 듯이. 그래서 너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듯이. 하지만 얼마 뒤 에곤 실레와 헤어진 발리 노이질은 얼마 뒤 간호사로 자원입대했다가 성홍열로 사망한다. 발리에게 에곤은 죽음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죽음'을 안고 있는 소녀는 에곤 실레 자신을 투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에곤 실레는 예술사의 여느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에 모든 것을 바쳤다. 예술=죽음을 안는 것이 자신을 파괴하는 일일지라도, 그는 예술=죽음을 포옹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예술이 곧 죽음이라는 것은 비단 은유만은 아니다. 누구보다도 예술에 집착했던 에곤 실레는 스페인 독감으로 28세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꿈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었다.


<소녀와 죽음>을 자신이 버린 연인에 대한 심정으로 해석하든, 자신이 안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든 <소녀와 죽음>이 에곤 실레와 세기말 비엔나의 마찰로부터 낳은 작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개인이 맞설 수 없는 거대한 전쟁이 에곤 실레가 연인을 버릴 계기를 만들었으며, 경제적 궁핍과 미학적 몰이해가 한 예술가의 고뇌와 때 이른 죽음을 낳았다. 세계와 예술가가 마찰할 때, 그 비명으로 예술이 터져 나온다.


마찰의 비명과 시대의 이름

세계와 개인이 마찰하는 것은 비단 에곤 실레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은 그가 어떤 시대에 속해 있더라도 세계와 마찰할 수밖에 없다 [5].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대가 저물고 역사가 그 시대에 이름을 붙일 때, 역사는 세계와 마찰한 개인의 비명들을 긁어모아 그 시대에 이름을 붙인다. '세기말 비엔나'는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와 아르놀트 쇤베르크 같은 이들의 비명이 모여 만든 이름이다. 아마 우리가 '세기말 비엔나'라는 단어로부터 강한 이끌림을 느끼는 것은 그 이름 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이 모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대의 이름에 이끌리는 일은 그 시대와 마찰했던 사람들의 비명에 이끌리는 일이다. 


글로부터 펜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글을 쓰는 내내 한 가지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시대는 과연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비명은 길고 넓은 역사 속에서 공허하게 잊힐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일종의 묵시록적 선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시대와 마찰하고 비명을 질러라. 그러지 않으면 무한한 시간 속에 잊힐 것이다."



[1] 이에 대하여 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비엔나>를 추천한다.

[2] 에곤 실레의 선택에서,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보였던 예술에 대한 맹목이 떠오른다.

[3] 영화 <에곤 쉴레: 욕망으로 그린 그림>은 그의 삶을 스크린에서 충실히 재현했다.

[4] 세기말 비엔나에 대해 온라인에서 읽어볼 만한 글들을 소개한다: <‘벨 에포크’ 시대의 반항아들, 세계를 건설하다><문갑식 기자의 Oxford Letter(43)><책과 혁명, 그리고 어제의 세계>, <세기말 비엔나 - 바그너, 클림트, 쇤베르크가 함께 있었던 도시>

[5] 노벨 문학상 수상자 16인의 인터뷰집 제목이 <16인의 반란자들>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른 시간에, 언젠가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