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리학자 J Jun 08. 2017

지나간 시간의 바스러진 조각들

옛 연인들의 시간, <화양연화>와 <라라랜드>에 대하여

모든 로맨스 영화는 둘로 나눌 수 있다. 연인들이 행복하게 끝나는 영화와 그렇지 못하고 헤어지는 영화다. 두번째에 속하는 영화의 주인공들은 만나고, 사랑하고, 결국 헤어진다. 헤어진 연인들을 다룬 어떤 영화를 보면, 영화의 이야기가 비극이라는 고삐에 꿰여 슬픈 결말을 향해 끌려가는 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영화는 그저 관객들을 신파로 몰고 가, 영화가 끝나면 잊어버릴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좋은 영화는 반드시 그런 신파로 영화를 끝마치지 않는다. 16년 차의 시간을 두고 개봉한 두 영화, <화양연화>와 <라라랜드>는 비극에 꿰여 끌려가기보다는 비극을 이끌고 어디론가 우리를 데려가는 영화다.


화양연화: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화양연화> 중 <Yumeji's Theme>

첸 부인(장만옥)과 차우(양조위)는 각자의 배우자와 함께 홍콩의 한 아파트의 방 하나씩을 세놓는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은 복도를 지나야 하고, 거기에 집주인의 수다스러움이 더해져 각자의 사생활의 경계는 흐릿하다. 공교롭게도 첸 부인의 남편과 차우의 아내(영화 내내 그들은 목소리로만 출연할 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는 서로 눈이 맞아 장기간 해외 출장을 핑계로 불륜의 밀월여행을 떠난다. 각자의 배우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첸 부인과 차우는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이 죄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만나는 내내 사랑과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그들은 차우가 홍콩을 떠나는 것을 계기로 헤어지게 된다. 


영화는 검은 바탕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띄우며 시작된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첸과 차우의 시간을 한참을 그린 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라는 문장을 띄운 뒤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것은 '이제 이곳에 남은 것은 없다'라는 정서이다. 더 이상 내 앞에 내가 사랑하던 사람은 없고, 그와의 기억도 시간 속에 흐려져 간다. 


영화의 제목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일생에 한 번뿐인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한자 뜻을 그대로 풀면, '꽃 모양의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이 된다. 또한, 중국어에서 '화양(花樣)'이라는 단어는 속임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 그렇다면, "화양연화"라는 단어의 중의성으로 미루어볼 때, 영화의 제목은 일생에 한 번뿐인 아름다운 시절은 곧 신기루 같이 허망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순간이 아름다웠다고 기억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을 현재에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여기'의 온갖 잡다한 현실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현재로부터 과거까지의 두터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양연화"의 역설로 인해, 영화는 시작하기도 전에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결정되게 된다. 예정된 결말을 암시하듯, <화양연화>의 미장센은 우울하고, 색조는 톤 다운되어 있고, 두 연인은 늘 비 오는 밤을 배경으로 만난다.


<화양연화>라는 제목으로 인해 영화는 시작하기도 전에 비극으로 결정되었던 것처럼, 첸 부인과 차우의 사랑 또한 그들의 사회적 위치로 인해 시작하기도 전에 이별로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알레고리는 바로 '비'이다. 이상하게도, 첸 부인과 차우는 유독 비를 자주 맞는다. 홍콩의 어둑한 뒷골목에서, 그들의 좁은 집 앞에서, 그들은 비 맞은 채로 서로를 위로한다. 비 맞은 그들의 모습은 지치고 초라해질 법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위로 때문에 버틸 수 있다. 그러나 내리는 비는 그들의 옷을 무겁게 만든다. 습한 홍콩의 날씨는 그들의 옷이 쉽게 마르게 하지도 않는다. '비'의 알레고리가 상징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사랑을 결국 끊어내 버리는 현실의 무게일 것이다. 첸 부인과 차우에게는, 그들의 관계가 불륜이며 60년대 홍콩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은 관계라는 현실이 그들의 옷을 젖게 만들던 '비'였을 것이다.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지만, 현실 앞에 무력한 것이 사랑이기도 하다 [2].


라라랜드: 지나간 날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eb's

<La La Land> 중 <City of Stars>

<라라랜드>는 한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왓슨)와 자신만의 재즈 바를 열기 원하는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이 LA를 배경으로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에 대한 영화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아름다운 LA의 세 계절 동안 사랑했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각자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기도(미아의 독백극 기획과 오디션 참가), 꿈을 좇다 길을 잃기도 한다(세바스찬의 상업 락 밴드 참가).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각자의 꿈을 이루는 순간을 눈 앞에 두고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서로 헤어진 채로 각자 꿈을 이룬 두 남녀가 영영 어긋나는 현실과 '어긋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으로 이루어진 환상을 병치하여 보여준 뒤, 스태프 롤을 올린다.


앞서 <화양연화>에서 두 연인을 헤어지게 했던 것이 부정적인 현실이라면, <라라랜드>에서 두 연인을 헤어지게 한 것은 그들의 꿈이다. 사실 영화에서는 미아와 세바스찬이 헤어진 이유를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미아가 오디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LA에서 파리로 건너가야 함을 암시하는 짧은 씬 이후, 5년 뒤 겨울로 영화는 도약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 짧은 씬이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면이었는지, 아니면 어떻게라도 관계를 이어나가자고 하는 장면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 순간 그들의 사랑과 각자의 꿈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서로에게 끌렸던 이유는 그들이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들이 가진 꿈에 대한 갈망이 그들을 반짝이게 했기 때문이다. 꿈을 품은 한 청년이 꿈을 품은 다른 청년에게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가장 꿈에 목마를 때 만나, 꿈을 이루기 직전에 헤어진다. 그들은 그들의 반짝임이 가장 찬란해지는 순간을 결국 눈 앞에서 확인하지 못한다. 얄궂은 연인들의 운명이 가엾다 [3].


하지만 세바스찬은 자신의 꿈의 간판에 "Seb's"를 달아 놓는다. 그것은 그의 전 연인 미아가 그의 꿈에 달아주었던 이름과 로고였다. 그들은 서로가 꿈을 이루는 순간에 함께 하지 못 했지만, 적어도 그들이 꿈을 이루기 위한 결정적인 스파크를 서로에게 주었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메신저스 밴드 활동으로 꿈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헤매고 있을 때 결정적인 충고를 했고, 세바스찬은 미아가 포기할 뻔한 순간에 그녀를 붙잡아 오디션 장으로 보냈다. 그들은 각자 오랜 시간 동안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을 각자의 잔에 채웠지만, 잔을 넘치게 하는 결정적인 한 방울은 스스로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온 한 방울, 그것이 그들의 잔을 넘치게 했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재즈 바에 달아놓은 간판 "Seb's"는 아마도 그 한 방울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에필로그: 흩어진 보석들에 대하여

재미있게도, '일생에 한 번뿐인 거짓말 같은 시절'을 뜻하는 <화양연화>의 제목과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는 <La La Land>의 제목은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사랑은 아름다운 꿈이다"라는 명제가 두 영화가 쏘아 올린 화살이 닿으려고 하는 지점인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밤에 속한 것이다. <화양연화>에서 첸 부인과 차우는 밤에 소설을 쓰며 서로의 사랑을 키워가고, <라라랜드>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은 밤에 노래를 부르고 천문대에 오른다. 그리고 밤이 저물고 낮이 떠오를 때, 사랑은 마법처럼 깨진다. 밝은 빛 아래에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의 민낯을 마주해야 하거나, 두 사람이 함께 걷던 길이 이미 교차로를 지나 서로 갈라져서 걸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두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꿈이 깨고 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꿈속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무의미의 포말 속에 잠기기도 하며, 잠에서 깬 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꿈속의 기억들 대부분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나간 사랑은 무의미하기만 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꿈은 우리가 '이곳 너머'를 그렸던 갈망의 흔적이다. 인간이 꿈을 꾸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곳 너머'를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 또한 그와 같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지금'에서 '내일'로 건너갈 수 있다. 사랑이 무너졌다고 해도, 사랑의 그러한 역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왜 중요한가.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의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덕분에 세계는 잠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우리는 늘 무너진 사랑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옛 연인이 그립기도, 여전히 마음 한가운데에 사랑이 남아 있기도, 혹은 그 사람이 가엾기도 하기 때문이지만, 무너진 사랑이 그리운 이유는 우리가 무너진 사랑의 바스러진 조각들로부터 무언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조각들은 사실 부스러기가 아니라 보석이다. 강물에 묻어 흘러내리는 사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보석과 사금은 우리를 과거에서 미래로 이끈다. 그것이 사랑의 역할이다.



[1] 나는 영화 "화양연화"에 대한 수많은 리뷰에서 중국어 '화양'이 속임수에 해당한다는 것을 지적한 리뷰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데에 놀랐다.

[2] 앞서 나는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지만, 현실 앞에 무력한 것이 사랑이기도 하다"라고 적었다. 현실을 극복하는 사랑이 물론 위대하기는 하지만, 사랑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한 가지 면만 보고 그것을 찬양하는 것은 무척이나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오늘날 청년들이 처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첸 부인과 차우의 사랑은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으므로 약한 것이었을까? 그들의 사랑이 강하고, 약하다는 일률적인 잣대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들의 사랑이 강하고 약한지 일률적으로 구분 짓는 행위 자체가 그들의 옷을 젖게 하는 '비'는 아니었을까? 

[3]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결국 그들이 서로가 꿈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세바스찬은 미아의 영화를 통해, 미아는 Seb's를 통해. 아마도 그들은 지나간 시간의 바스러진 조각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무는 시대의 초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