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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Jun 17. 2017

두 세대의 세 가지 사랑

연극 <Love, Love, Love>와 두 세대의 갈등과 사랑에 대하여

문득 4년 전 보았던 이선균, 전혜빈 부부 주연의 연극 <Love, Love, Love>가 떠올랐다. 이 연극은 2010년에 영국 극작가 마이크 바틀렛이 무대에 올렸던 작품을 한국 무대로 가져온 작품이다. <Love, Love, Love>는 68 혁명을 주도했던 부모 세대와 오늘날 자식 세대 간의 갈등을 주된 골조로 하여 이루어진 연극이다. 당시에도 연극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었지만, 청년 문제가 임계점에 달한 지금 이 연극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않았든 청년 문제는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왔다. 2007년 출판된 우석훈과 박권일의 저서 <88만 원 세대>가 청년 문제를 환기시킨 이후로, '88만 원 세대'니 '3포 세대'니 하는 신조어들이 모두가 아는 단어가 되었으며, 이번 대선에서는 거의 모든 대통령 후보들이 청년 공약을 자신들의 주요 공약으로 꼽을 만큼 청년 문제 담론이 중요해져 왔다. 청년 문제는 비단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브렉시트 투표나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 대선에서 보듯이 청년층과 중장년층은 매우 상이한 정치적 견해를 가졌고, 그 바탕에는 세대별 경제적 격차 심화라는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영국 작가에 의해 쓰인 연극 <Love, Love, Love>는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지만, 두 세대의 삶을 매우 깊은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다.


1968년 5월의 낭만

1968년, 훗날 "68 세대"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은 68 혁명(May 68)을 통해 프랑스를 비롯한 온 유럽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68 혁명을 주도한 젊은이들은 당시 사회에 만연한 보수적인 가치와 전근대적인 잔재에 대항하여 인권, 성평등, 반전 등의 진보적인 가치를 주장했다. 그들은 1968년 5월 파리에서 혁명을 시작했고,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꽃은 베를린, 런던, 로마, 뉴욕으로 점차 퍼져 나갔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확신했다. 다소 초라하게 끝난 짧은 혁명의 시절에도 불구하고, 길게 살아남은 68 세대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지적한 서구 사회의 부조리가 점점 나아지는 것을 목격했다. 민주주의는 일상과 더욱 가까운 것이 되었으며, 성 평등과 인종간 평등의 가치를 (명목적으로는) 실현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토마 피케티에 의하면 인류 역사에 다시없을 고도의 경제 성장의 과실도 누렸다. 연극 <Love, Love, Love>가 그리고 있는 것은 40년에 걸친 청년-중년-장년기를 그린 68 세대의 연대기이다.


비틀즈의 60년대와 데이빗 게타의 2000년대

68 혁명 당시 유명했던 슬로건 중 하나 "We want structures that serve people, not people serving structures"

68 세대는 수많은 혁명의 슬로건을 파리의 수많은 벽에 그래피티로 남겼는데, "우리는 사람이 사회구조에 봉사하는 것이 아닌, 사회구조가 사람에 봉사하는 것을 원한다(We want structures that serve people, not people serving structures)"는 슬로건은 그중 하나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나이 든 68세대의 모습을 보면 결국 그들 또한 사회에 봉사한 사람들(people serving structures)임이 드러난다. 30대 초반의 젊은 영국 극작가 마이크 바틀렛이 Love, Love, Love에서 꼬집은 것도 바로 그러한 모순에서 비롯되는 세대 간 갈등이다. 68세대는 자신들이 혁명을 통해 사회 변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으며, 그 이후 피땀 흘려 노력해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68세대가 (로지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세상을 샀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갈등은 68세대가 사회의 주축으로 성장한 시대의 환경과 오늘날 젊은 세대가 성장하고 있는 시대의 환경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68세대가 성장한 시기는 인류 역사에 유래 없는 호황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은 일본 버블 붕괴, 동아시아 IMF, 서브프라임 사태 등으로 현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정당성마저 위협받는 장기 불황에 직면했다. 2008년과 2011년 사이의 장기 불황에는 "Great Recession"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을 정도였다. 이러한 장기 불황은 젊은이들이 나눠 먹을 파이의 크기 자체를 작게 했고, 오늘날 젊은이들은 사회 구조의 부조리나 자신의 꿈에 대해 되돌아보는 여유를 가지기보다는 당장 눈 앞에 놓여 있는 파이 한 조각을 쟁취하기에 바쁘게 되었다. 현대의 젊은 세대는 경제적 요구에 압도되어 부모 세대가 누린 혁명의 낭만을 누리지 못 하는 세대가 된 것이다 [2]. 그들의 부모 세대가 젊었을 때에는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라는 꿈을 꿀 수 있었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는 그런 꿈조차 사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세대의 이런 모습은 68세대가 보기에는 철없고 생각 없는 무기력한 세대로 비친다. 왜 요새 젊은이들은 꿈을 꾸지 않는가? 현실이 가혹한 것이라면 왜 우리가 1968년에 그랬던 것처럼 들고일어나지 않는가? 68세대의 전형적인 비판이다 [3].


1965년 비틀즈, 그래미 수상을 축하하며

비틀즈의 60년대, Blur의 90년대, 데이빗 게타의 2000년대를 지나며 40년 동안 깊어지고 멀어진 부모 세대(68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갈등은 이 연극의 주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연극이 진행되는 2시간 내내 누적되다가 연극의 마지막인 3막의 끝에 가어야 폭발한다. 켄과 산드라의 딸 로지는 자신의 삶의 불안정함이 부모의 탓이라며,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켄과 산드라에게 집을 요구한다.

내 얘기만 하는 거 아냐. 내 친구들 다 그래. 우리 나이 때 우리 부모보다 엄청 가난해. 다들 코딱지만 한 아파트에서 애들 길러. 부모는 빈방도 많은 저택에서, 돈을 깔고 사는데. 정말 욕 나와. 자기네들만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나서는, 사다리를 부숴버렸어.

켄과 산드라는 딸의 말에 대해 반박한다.

우리도 열심히 일했어. 40년 동안 우리 둘 다. 요즘 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으면서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들은 없는 사다리라도 만들어서 올라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딸 로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같은 나이 때를 비교해보면, 자식 세대는 형편없이 가난하다. 없는 사다리를 만들려고 노력해봐도 사다리를 만들 재료조차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세대 갈등은 작품에 대한 영국 언론의 상반된 반응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영국 런던에서는 2012년에 왕립 극장에서 를 공연했는데, 영국 언론에서도 이 연극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가디언의 미카엘 빌링턴은 "60년대의 생존자로서, 그 세대에 대해 불공정했다고 생각한다. 그 기간 동안 사형 제도 폐지, 성차별 및 인종 차별 금지 등 영국은 보다 더 관용적인 곳이 되었다.(As a survivor of the 60s, I think Bartlett is unfair to a decade that saw Britain become a better, more tolerant place: capital punishment was abolished, homosexuality decriminalised and racial discrimination outlawed.)"라고 하며 68 세대에 대해 옹호를 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반면, 텔레그래프의 찰스 스펜서는 "그의 연극은 매우 감상적이고 질펀하며 자기에 관대한 68 세대의 가치가 때로 매우 이기적이라고 주장한다.-이에 대해 주인공 부부의 관계가 배신의 행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68 세대의 꿈을 수용한 대다수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았음을 제시한다.(His play insists that the soppy, sloppy self-indulgent values of the Sixties were often deeply selfish – it is significant that Kenneth and Sandra’s relationship began with an act of betrayal – and also suggests that that many of those who embraced the Sixties dream never fully grew up.)"라는 평을 내리며 68 세대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 자체는 마치 연극의 외연이 사회로 확장된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극작가 마이크 바틀렛이 사회를 무대로, 시민을 배우로 쓴 것처럼 연극의 주제는 사회 안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Love? Love! Love...

나는 제목의 세 Love 사이에 물음표(?)와 느낌표(!)와 말줄임표(...)를 넣고자 한다.


사랑에 붙은 첫 번째의 물음표는, 켄과 산드라의 사랑이 과연 바람직한 형태의 사랑인가라는 물음이다. 연극의 가장 마지막에서, 켄과 산드라는 커리어에서 실패한 딸과 자폐아 아들의 외침을 외면하고 "All you need is love"에 맞춰 춤을 춘다. 마치 그들의 세계에는 단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이 마지막 장면은 마이크 바틀렛이 우리에게 던지는 사랑에 대한 물음표일 것이다.


두 번째 사랑에 느낌표가 붙은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만이 답이기 때문이다. 온전하지 않은 그들의 사랑 때문에 기형적인 모습의 자식 세대가 탄생한 것이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사랑뿐이다. All you need is love. 필요한 것은 단지 사랑이다. 자기애적인 사랑, 단 둘만을 바라보는 사랑이 아니라 주변까지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세 번째의 말줄임표는, 온전한 사랑을 위해서 그만큼의 사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사랑을 위해서는 때로는 말하지 않고, 귀를 열어둔 채로 외롭게 생각해야 한다. 둘이 하는 사랑에 혼자 하는 사색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랑에 멈추지 않고, 내 주변까지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유와 반성이 필요하다. 나와 너만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사랑이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되기 위함은 쉽지 않다.


온전한 사랑은 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그것에 대한 사색(...)을 지속적으로 하는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힘들여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사랑을 대할 때 항상

 활동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하며, (...) 생각하고, 행동하고, 변형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럴 때에 사랑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 우리가 연극 <Love, Love, Love>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 이 글은 4년 전 블로그에 썼던 전시 리뷰를 다듬은 글이다. 

[2] 게다가 오늘날 젊은이들은 싸울 대상마저 분명하지 않았다. 1968년 세계에는 뚜렷한 적이 있었다. 2010년의 세계에는 더 이상 그런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월 가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를 통해 월 스트리트를 점령했지만, 시위가 끝나기가 무섭게 월 스트리트는 시위가 언제 있었냐는 듯 다시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3] 몇 년 전 한국의 386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했던 비판과 정확히 일치한다. 연극 <Love, Love, Love>가 한국에서도 유효할 수 있는 지점이다.

[4] 극에 대해 읽어볼 만한 글들은 다음과 같다. <Wikipedia의 Mike Bartlett 항목 (영문)><Wikipedia의 68세대 항목 (영문)><가디언 지의 연극 리뷰 (영문)><텔레그래프 지의 연극 리뷰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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