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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Oct 15. 2017

이곳에서 그린 저곳의 발자취

나를 사로잡은 그림들에 대하여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서재를 보면 된다. 책장은 그 주인에 대해 알려줄 가장 직접적인 힌트가 될 수가 있다. 책장의 주인이 어떤 분야에 관심이 많은지,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 책장은 그 사람의 취향과 철학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의 내면에 닿고 싶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예술 작품을 보면 된다. (물론 그 사람이 콜렉터라는 가정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닿을 수 있는 작품만을 자신의 방에 건다. 우리는 백만장자와 같은 슈퍼 컬렉터가 아니므로 예산은 늘 한정되어 있고, 액자를 걸 수 있는 방은 여러 작품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어떤 사람은 작품을 콜렉팅 하는 일을 자서전을 쓰는 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1]. 자신이 가진 작품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 소박한 예산 한도 안에서 아트페어나 갤러리를 다니며 마음에 드는 작품 몇 점을 내 방에 걸고 있다. 나는 그 작품들이 진심으로 나 자신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작품 하나하나가 내 감정의 수많은 결들 중 하나하나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드는 모든 작품을 내 방에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N포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내게 작품 콜렉팅은 어디까지나 '사치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고 '필수의 영역'에 속하는 일들을 하기에도 내 벌이는 빠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마음 가장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작품은 때로 '미술관 레벨'이나 '교과서 레벨'에 속하는, 엄두도 내기 힘든 경우도 많다. (사실 그런 레벨의 작품은 대개 명작이므로 내 마음을 건드리는 일이 잦다.)


그럴 때면, 그 작품들이 비록 나의 일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마음 한 구석 깊은 곳에 그 작품들을 담아둘 수밖에 없다. 그 작품들이 뉴욕 MoMA,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에 모셔져 있거나, 재벌 가의 안방에 걸려 있어서 내가 가져올 수 없는 작품이라도(물론 그 작품들은 내 방보다도  인류사적 의미에서 그런 곳에 있는 것이 낫다.), 어쨌든 그 작품들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은 내 자유다. 이 글은 내가 감히 콜렉트 할 수 없는, 그러나 내 마음속 어딘가에 갈무리되어 있는 작품들에 대한 글이다.


어둠 뒤에서 바라보는 눈

Joan Miró, Personnages et Oiseaux Dans La Nuit (1974, 파리 퐁피두 센터 소장)

호안 미로의 <어둠 속의 사람과 새>는 2009년 서울시립미술관 퐁피두 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 전에서 본 작품이다. 가로 2.74 m, 세로 6.37 m의 거대한 화폭 아래서 나는 그림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큰 그림은 많이 보았지만, 이 작품만큼 나를 이끄는 그림은 지금까지도 없었다. 붉은 얼룩 위에 새와 사람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검은 형태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마치 어두운 곳에서 새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검은 새들의 시선 아래에서 시간이 멈추는 경험을 했다.


시간의 상실감과 그로 인한 완전한 정지. 그림이 주는 완전한 압도감 속에서 어둠은 스멀스멀 나의 모든 것을 뒤덮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웠다. 멈춘 시간 속에서 어둠에 뒤덮인 채로, 어둠 속에서 새의 눈동자들이 나를 응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는 옷을 입고 있는 상태와 나체를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나는 어둠 속에서 발가벗겨진 상태로 그 눈동자들의 응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새의 눈동자들은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눈동자들은 내 모든 것을, 내 모든 어둠을 낱낱이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밖으로 꺼내려하고 있었다. 산 꼭대기에서 묶인 채로 새들에게 영원히 간을 쪼이는 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나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 새들은 날카로운 부리로 나를 쪼며 내 슬픔과 고독과 고통을 하나하나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면서 어둠에서 온 그 눈동자들을 보고 있자니, 그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 새들은 내가 지닌 어둠들 속에서 잉태된 것이며, 그것들이 내게 주는 고통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온 것이었다. 나는 그 어둠의 수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 모든 고통이 시작된 곳을 찾아야 했다. 내 안에 있는 하나의 지점에서 모든 고통이 빚어지고 흘러넘쳐 강을 만들었다.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나는 강변을 수색했다. 수색 끝에 내가 알아낸 것은, 그 어둠과 그 새들은 나의 분열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의 이상과 현실, 나의 갈망과 그것의 상실, 먼 곳을 그리면서도 가까운 곳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태도, 이것들과 비슷한 이런저런 분열들 속에서 내 어둠은 빚어졌고 그 어둠 속에서 새들은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어둠과 새들은 내가 지고 가야만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발을 붙이고 있는 현실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한, 나는 그 어둠을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어둠은 내가 현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대가로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현실로부터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나는 현실을 떠나 자유를 향한 비상을 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영구적으로 새들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새들에게 고통받으며, 현실의 세계 속에서 영원히 절름거리며 살아갈 운명이었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빨간 줄

Barnett Newman, Onement I (1948,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내가 추상 회화에 매료된 것은 대학 시절 들었던 미술사 강의에서 바넷 뉴먼의 색면 추상 작업을 봤던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결코 잘 인쇄되었다고는 볼 수 없던 핸드아웃 한 구석에 있던, 아주 조그만 크기의 "zip"을 보고 그전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전율을 느꼈다. 잘 보이지도 않던 바넷 뉴먼의 작은 zip이 내겐 세계 전체를 가로지르는 선처럼 느껴졌다. 그 선은 세계를 정의하는 선이었다. 미니멀리스트의 주의 깊은 선택이 아닌 한, 단색의 화면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색의 화면을 선이 가로지르는 순간, 바넷 뉴먼이 그린 화면은 하나의 세계가 된다. 선은 자신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도, 또는 자신을 향해 화면의 다른 모든 부분을 끌어당기기도 하며 화면을 지배한다. 


우리 각자는 우리의 세계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일 것이다. 우리가 유명인이든 아니든, 우리는 세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개인으로, 때로는 가족이나 직장과 같은 집단으로, 때로는 한 세대로,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세계를 비가역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가 변화시킨 세계의 한 부분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은 비가역적 변화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과는 다른 세계일 것이고, 또한 우리의 세계는 우리가 죽고 난 다음과는 다른 세계일 것이다. 바넷 뉴먼의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선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남긴 궤적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넷 뉴먼의 작품으로부터 느끼는 숭고한 감정은, 우리가 세계에 남길 비가역적 궤적으로부터 느끼는 숭고함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때로 경이롭지만, 때로 무거운 책임이기도 하다.


바넷 뉴먼의 작품은 나-세계 문제 너머의 문제 너머의 문제 또한 보여준다. 세계와 신의 문제, 그리고 나와 신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어두운 화면을 가로지르는 밝고 붉은 바넷 뉴먼의 수직선은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신에게서 흐르는 피를 보여준다 [4]. 그 피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대속이다. 그 대속의 순간으로부터 세계는, 그리고 인간은 새롭게 정의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인간은 각자의 수직선을 세계에 그릴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아브라함 계 종교(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괄하는 범 기독교)의 전통에 기반한 해석이지만, 이 해석을 종교중립적인 언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세계에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 현대는 신의 부재를 가정하고 만들어진 시대다. (적어도 세계의 주류를 이루는 국가들에서는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는 종교의 탈을 쓴 광기나 교조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견고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현대가 잃어버린 것 또한 분명 있다. 종교적 광신은 이성에 대한 광신으로 대체되었고, 신앙에 대한 맹목은 자본과 사회적 성공에 대한 맹목으로 대체되었다. 중세는 종교의 남용과 오용으로 병들었다면, 현대는 이성과 자본의 남용과 오용으로 병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남용과 오용을 피하는 믿음이 바로 바넷 뉴먼의 '수직선'이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쏟아지는 고민 앞의 뒷걸음질

도윤희, 액체가 된 고민 (2008, 후면 회화,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누구나 어려운 시절을 겪는다. 나 또한 그렇고, 어쩌면 올해가 내겐 그런 시절일 수도 있다. 나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고, 그 도주의 과정에서 많은 것들, 그리고 내게 소중한 것들을 잃거나 포기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만난 작품이 바로 도윤희의 <액체가 된 고민>이다. 흐르는 강의 밤 풍경을 그린 듯, 가로로 넘실거리는 물결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물결 위로는 짙은 밤안개가 내려앉아 있다. 안개가 내려 깔린 밤의 강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물이 흐르는 소리뿐이다. 맑았던 날의 강이라면 물소리가 평화롭겠지만, 비 온 다음날의 강이라면 완전한 적막 속에 홀로 쏟아지는 물소리는 두렵게까지 느껴진다. 아무것도 볼 수도 없이, 압도적인 폭력처럼 쏟아지는 물소리와 물 냄새.


작품의 제목이 상징하듯,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고민은 끊이지 않고, 시야를 가리는 밤안개처럼 고민하는 이의 마음은 답답하다. 쏟아지는 고민들은 나를 저 아래로 휩쓸고 내려갈 것만 같고, 나는 그 아래에서 고민에 빠져 죽는 익사체가 될 것만 같다. 액체가 된 고민 앞에서 나는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불어난 강물이 나를 덮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대상 앞에서 느끼는 절대적인 무력함, 그것이 우리가 고민의 홍수로부터 느끼는 유일한 감정이다.


고민은 나로부터 나왔지만 그것이 내게서 나온 순간 더 이상 나는 그것의 주인이 아니다. 칸트는 이성에 의해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돼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고민의 난이도는 다르겠지만, 보통 홍수처럼 넘치는 고민에 맞설 때는 그것이 생존의 문제와 같다. 고민의 순간을 지나고 나면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에는 고민은 절박한 문제다. 고통을 객관화할 수 있는 것은 고통에서 물러난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이기 때문이다. 괴로워 사람에게 어떻게 그 고통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서 '고통의 주인'이 되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쏟아지는 고민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고통 앞에서 어떻게 했을까. 고통에 지속적으로 나를 노출시켜 고통에 둔해지기를 바랐던 적도 있고, 고통을 유발하는 방아쇠와 같은 물건과 장소를 피하기도 했고, 고통에 맞서 싸워보기도, 신에게 기도하기도 했다. 그 모든 방법들이 어느 정도 효과적이었기도, 어느 정도 효과적이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고민과 고통 앞에 완전한 처방, 완전한 치료제는 없는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쏟아지는 고민 앞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무력감을 이기고 강으로부터 뒷걸음질 쳐야 한다. 세찬 강물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뒷걸음질 쳐서 강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더 안전한 방법일 것이다. 뒷걸음질 치다 돌에 걸려 넘어질 수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겁에 질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강물에 떠내려가 익사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익사하지 않으려 뒷걸음치다 다치기, 아마도 그것이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림의 세계로 나를 보기

어쩌면, 우리가 그림을 볼 때 보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지시하고 있는 나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우리는 대개 다른 것을 떠올린다. 그것은 작가가 그리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평론가가 지적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유년시절에 잊어버린 것,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과 같이, 우리는 그림으로부터 우리의 결핍과 상실과 갈망을 본다. 그렇기에 화가들이 하는 일은 사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저곳'에 있는 어떤 사상들을 '이곳'으로 투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투영하려고 하는지도 모른 채 '저곳'과 '이곳'을 지금도 잇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미술 작품을 보는 일이 매혹적인 까닭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1] 엘링 카게, 가난한 컬렉터가 훌륭한 작품을 사는 법, 디자인하우스 (2016).

[2] 바넷 뉴먼의 <Onement I>에 대한 뉴욕 MoMA 작품 설명

[3] 이 글의 호안 미로에 대한 부분은 2011년 내가 블로그에 쓴 글에서 다듬어 가져온 것임을 밝힌다.

[4] 내가 바넷 뉴먼으로부터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내가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동시에 바넷 뉴먼 자체가 종교적인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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