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내가 열어둔 창문은 어떤 세상인가?

내가 열어둔 창문은 하나가 아니었다.

by 너머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 창문은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는가에 따라,

어떤 상처를 겪었는가에 따라,
그리고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심리학이라는 도구는 이 창문을 해석하고 다듬고 확장하는 렌즈가 되어 준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종종 세 명의 위대한 심리학자를 언급하곤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그리고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봤고,
우리 역시 이 세 창문을 번갈아 열어보며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려 애쓴다.


프로이트의 창: 무의식과 본능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위를 무의식의 산물로 보았다.
감춰진 욕망, 억압된 감정, 그리고 과거의 상처들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하고 싶을 때
이 창을 열어본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건 내 무의식의 소행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나를 이해하고, 때론 용서한다.


아들러의 창: 열등감과 목표의 심리학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이 열등감을 극복하고
성장하려는 존재라고 보았다.
과거가 아닌 지금의 선택과 목표가 우리를 만든다는 시선은
삶을 능동적으로 끌어가게 만든다.
나는 이 창을 열어 나의 열정을 되새기고,
미래를 향한 나의 방향을 점검한다.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자극과 위로가 동시에 되는 질문이다.


융의 창: 자아의 통합과 상징의 세계


칼 융은 더 깊고 넓은 차원의 인간 이해를 시도했다.
그는 개인의 무의식뿐만 아니라 집단 무의식 속 원형(archetype)과
상징들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해석했다.
나는 삶이 모호하고 복잡할 때 이 창을 연다.

그 안에서 나의 정체성, 자존감, 내면의 나를 탐색한다.
세상을 상징과 의미로 해석하는 이 창은
삶에 조금 더 깊은 결을 부여해 준다.


중요한 건, 한 개의 창만으로는 세상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우리는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목적에 따라
세 창문 중 하나를 더 자주 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하나의 창문으로 세상을 단정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종종 ‘프로이트’를 빌려 자기 합리화를 하고,
‘아들러’를 끌어와 목표의지를 강화하고,
‘융’을 인용해 정체성과 자존감을 지탱한다.
이 세 창문을 내 마음의 필요에 따라 선별해 쓰는 순간,
그 창문은 ‘이해’가 아닌 ‘방어기제’가 되기도 한다.


마치, 퍼시 대마왕처럼

퍼시 대마왕은

자신의 왕국과 세상이 핑크빛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정신 나간 수준의 단일한 기준은
결국 수많은 생명과 마법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는 자신의 프레임으로만 세상을 판단했고,
그 판단은 오만함이 되었고, 파괴가 되었다.

심리학이라는 도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창문이지
판단하거나 고정시키는 프레임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내가 어떤 창문으로 세상을 보는지를 계속해서 묻고 싶다.
그리고 나 아닌 누군가를 향해 그 창을 열 때,
나는 지금 이 시선이 이해를 위한 것인지,
단죄를 위한 것인지 되묻고 싶다.


세상은 단 하나의 창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양한 창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그 창을 여는 나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열어놓은 창문은
세상을 어떻게 비추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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