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어둔 창문은 하나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 창문은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는가에 따라,
어떤 상처를 겪었는가에 따라,
그리고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심리학이라는 도구는 이 창문을 해석하고 다듬고 확장하는 렌즈가 되어 준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종종 세 명의 위대한 심리학자를 언급하곤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그리고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봤고,
우리 역시 이 세 창문을 번갈아 열어보며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려 애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위를 무의식의 산물로 보았다.
감춰진 욕망, 억압된 감정, 그리고 과거의 상처들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하고 싶을 때
이 창을 열어본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건 내 무의식의 소행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나를 이해하고, 때론 용서한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이 열등감을 극복하고
성장하려는 존재라고 보았다.
과거가 아닌 지금의 선택과 목표가 우리를 만든다는 시선은
삶을 능동적으로 끌어가게 만든다.
나는 이 창을 열어 나의 열정을 되새기고,
미래를 향한 나의 방향을 점검한다.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자극과 위로가 동시에 되는 질문이다.
칼 융은 더 깊고 넓은 차원의 인간 이해를 시도했다.
그는 개인의 무의식뿐만 아니라 집단 무의식 속 원형(archetype)과
상징들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해석했다.
나는 삶이 모호하고 복잡할 때 이 창을 연다.
그 안에서 나의 정체성, 자존감, 내면의 나를 탐색한다.
세상을 상징과 의미로 해석하는 이 창은
삶에 조금 더 깊은 결을 부여해 준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목적에 따라
세 창문 중 하나를 더 자주 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하나의 창문으로 세상을 단정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종종 ‘프로이트’를 빌려 자기 합리화를 하고,
‘아들러’를 끌어와 목표의지를 강화하고,
‘융’을 인용해 정체성과 자존감을 지탱한다.
이 세 창문을 내 마음의 필요에 따라 선별해 쓰는 순간,
그 창문은 ‘이해’가 아닌 ‘방어기제’가 되기도 한다.
퍼시 대마왕은
자신의 왕국과 세상이 핑크빛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정신 나간 수준의 단일한 기준은
결국 수많은 생명과 마법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는 자신의 프레임으로만 세상을 판단했고,
그 판단은 오만함이 되었고, 파괴가 되었다.
심리학이라는 도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창문이지
판단하거나 고정시키는 프레임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내가 어떤 창문으로 세상을 보는지를 계속해서 묻고 싶다.
그리고 나 아닌 누군가를 향해 그 창을 열 때,
나는 지금 이 시선이 이해를 위한 것인지,
단죄를 위한 것인지 되묻고 싶다.
세상은 단 하나의 창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양한 창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그 창을 여는 나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열어놓은 창문은
세상을 어떻게 비추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