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높낮이가 있는 파도를 타고 나아가는 거라면 올해는 유독 그 파고 차가 심했던 해였다.
작년 이맘 때, 그러니까 암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과 마주해야 했을 때, 2020년에도 기어코 12월은 오고야 말거라는 평범한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 앞에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저 후회가 없으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하나 하는 질문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근데, 아니, 벌써?, 연말이 왔다.
암환자가 되기 전 내 마음의 눈은 항상 밖을 살피느라 바빴다.
'저 사람 지금 기분 안 좋나?'
'사람들 만나니까 좀 꾸며야겠지'
'어떤 모습이 서른 다운 걸까?'
어쩌면 앞으로 나를 챙길 시간조차 얼마 없을지 모른다는 걸 체감하고 나서야 밖을 살피던 에너지는 비로소 안을 향하기 시작했다.
'나 지금 편한가?'
'이거 내가 좋아서 하는 건가?'
'난 어떤 때 가장 행복하더라?'
'뭘하면 죽을 때 후회가 없을까?'
마음의 눈이 밖이 아닌 안을 향하면서, 나는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많이 행복해졌다. 행복하는 비결을 알았으니 암에 걸린 것도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행복이 남산위의 소나무처럼항상 변함없진 않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조끼를 입은 것처럼 암을 생각하면 뒷덜미가 서늘해지곤 했다. 자연치유를 선택하면서 치료에는 더 많은 주도권을 갖게 됬지만 그만큼 책임도 커졌다. 내 삶은 내 것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는 감사한 일들이 많아질수록, 나를 책임진다는 일은 더욱 더 막중한 과제로 느껴졌다. 치유를 위한 생활 원칙(운동, 채식 등)을 지키지 못하거나 불현듯 암이 악화되는 공포에 사로잡히면 자책과 좌절의 동굴로 기어들어가는 나 자신을 얼래고 달래 다시 일으키고 추스리는게 지난 1년 간 지겹도록 반복해온 일들이었다.
어떤 날은 지구가 날 위해 만들어진 꽃밭이고 나는 그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햇살이 된 것 같다가도 어떤 날은 인적없는 낭떠러지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두려움도 행복함도 끝나는가 싶으면 또 다시 고개를 들며 인생의 희노애락을 가르쳐 주겠다고 덤볐다. 그렇게 온탕과 냉탕을 오가면서 천국과 지옥이 꼭 죽어야만 가는 사후세계가 아니란 걸 알았다. 정말이지 굴곡이 많은 한 해였다.
코로나 한파에도 어김없이 거리를 수놓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서야 연말이 온 걸 알았다. 예상치 못한 연말을 맞이하려니 초대 받지 못한 자리에 온 것 마냥 멋쩍다. 그렇긴해도, 나쁘진 않다. 내가 어떤 한 해를 보냈던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걸, 그러니 너무 자주 죽음을 떠올리지 말고 내년에는 너도 돌아올 12월을 한번 기다려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 당연한 거지만, 죽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삶은 계속 이어지고 우리는 또 다음 연말을 준비해야할테다. 다시 돌아올 12월이 어색하지 않도록 나도 내년에는 이따금씩 연말의 나를 상상해보는 사치를 부리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