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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헷 Dec 18. 2020

슬리퍼의 속삭임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데

빠 : 여보, 내 슬리퍼 어딨어요?

엄 : 현관에 있겠죠

빠 : 없는데? 문앞에 딱 벗어두고 갔는데 도통 안보여

엄 : 당신 방에 찾아봐요


 사건의 전말은 아빠가 아침에 벗어두고간 슬리퍼의 묘연한 행적에서 시작했다. 쓰레기장에서 주워왔다고 해도 믿을 법한, 낡고 헤진 아빠의 갈색 면슬리퍼 말이다. 애정하던 슬리퍼를 찾아 헤매던 아빠는 소파 위에 올려진 털이 보송보송한 새 슬리퍼를 발견한다. 아마도 엄마가 아빠를 위해 사온 것이리라. 아빠는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미리 밝혀두건데 이건 털슬리퍼 마냥 따듯한 이야기는 아니올시다.


빠 : 내 방에도 없으니까 그렇지. 당신이 혹시 버린거 아니야?

엄 : 버리긴 왜 버려. 나 지금 밖에 나왔으니까 이따 들어가면 찾아줄게

빠 : 아니, 나 지금 당장 필요해. 어딨어? 내 슬리퍼.

엄 : 모른다니까? 슬리퍼 새로 사다둔 거 있으니까 일단 그거 신어요.


 이쯤에서 엄마가 우리집의 물건들의 거취에 대해 갖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좀 산만하다 싶으면 엄마 손에 들려 집구석 여기저기로 유배당하는 물건들은 대부분 다시 ‘엄마를 통해서만’ 원래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온다. 자기 물건이 사라졌을  식구들이 가장 먼저 찾는 사람도 엄마, 실제로 사라진 물건을 가장 빨리 찾는 사람도 엄마다. 그런 점에서 식구들은 가구나 살림살이의 이동과 거취에 대해서는 일절 엄마에게 대항하지 않는다. 자기가 애정하던 물건이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빼놓고는…


빠 : 왜 항상 당신은 내 물건을 맘대로 치우는거야.

엄 : 나 안 치웠다니까?

빠 : 집에 당신밖에 없었는데 당신 아니면 누가 그걸 건드리냐고

엄 : 몰라 몰라. 기억 안나. 나 지금 바빠

빠 : 일 저질러놓고 모른척 하면 다야?

엄 : 아니 왜 내 말을 못 믿어? 모른다면 모르는거지, 왜 사람을 못 믿냐고

빠 : 그럼 지금 당장 내 슬리퍼 가져와봐! 지금!!! 당장!!!

엄 : ............?


 아빠는 엄마가 자기 슬리퍼를 버렸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쓰레기통에도 없으니 이미 슬리퍼는 쓰레기 하역장으로 떠났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모르쇠로 일관하다 전화를 끊었고, 배째라는 태도에 아빠는 더 화딱지가 났다. 하지만 슬리퍼는 잠시 후 엄마방 침대 밑에서 무사히(?) 발견됐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슬리퍼가 엄마방 침대 밑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걸 본 아빠는 황당했을까, 안도했을까, 미안했을까?


 엄마로부터 낮의 소동을 전해들은 나는 그 슬리퍼 밑창에 로또나 수표를 감춰둔게 분명하다며 낄낄대고 웃었지만, 아빠의 열폭이 슬리퍼에 대한 애정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찜찜했다. 그래서 막 퇴근하신 아빠를 붙잡고 “아빠 낮에 왜그랬어?” 하고 물었고 이 질문은 2차 대전을 불러일으켰다.


 “슬리퍼가 왜 당신 방에서 나오냐고!”

 “기억이 안날수도 있지, 일부러 거짓말 한것도 아닌데 왜 나를 못 믿고…!!”

 “당신은 항상 그런식이잖아!”


  언성이 점점 높아진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고작 슬리퍼의 행방을 두고 옥신각신이라니, 자식보기 부끄럽지도 않은가? 아서라, 서로의 입장을 이해받지 못한 두 영혼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는 민망함이 곁들 미세한 틈도 없다. 정녕 이 사람들이 불과 며칠 전 만해도 당신이 있어 내가 있네 마네 하며 애정을 과시하던 그 분들이 맞는가 말이다. 이쯤이면 나와 애꿎은 슬리퍼는 슬쩍 자리를 비켜줌이 좋을 성 싶다.




 사실 나는 우리집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언니의 입장도 동생의 입장도 이해가 가는 둘째여서일까, 엄마 성격도 아빠 성격도 딱 반씩 닮아서일까, 집안의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기면 나는 한쪽편의 입장을 반대편에게 이해시키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집안의 평화를 수호하는 중재위원회 위원장직을 자처하곤 했다.(물론 내가 이해관계자가 아닐때만…) 이는 묘한 뿌듯함을 주기도 하지만 사실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다. 갈등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마음을 구석구석 살피되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헌데 어떻게 된걸까. 나이가 든 걸까,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어쩐지 이 싸움은 내버려두고 싶다. 어차피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문제다. 중간에서 분주하게 양쪽 입장을 대변해 줄 수는 있어도, 배우자에게 헤아림을 받고 싶은 그 감정을 제3자가 대신 채워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나대로 바쁜 사람이라고요? 알아서들 잘 풀어보세요.


 두 사람의 갈등이 내 마음 속 고요한 호수에 실낱의 바람도 일으키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태도로 나는 2차대전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와 방으로 향했다. 구경꾼 없는 싸움은 금새 화력을 잃었다.


 아침 식탁에서 엄빠는 또 허허실실 웃으며 농담을 주고 받는다. 아… 어제 에너지 소모 안하길 너무 잘했잖아? 이쯤이면 두 분이 '부부싸움은 물베기'란 격언을 이 집안의 유일한 미혼, 둘째 딸에게 몸소 가르치기위해 살신성인하고 계신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현관을 나가는데 제자리를 찾은 아빠의 슬리퍼와 눈이 마주쳤다. 이 모든 소동을 묵묵히 견뎌낸 고 녀석은 에너지를 아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속삭인다.


 “너도 지지고 볶을 네 짝이나 찾아.”


 쳇. 아침부터 슬리퍼에게 진 기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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