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May 22. 2016

무거운 숙제 _ 강남역 10번 출구에 서서

열한 번째 지난주




죽음으로부터의 시작     


 지난주, 쾌거로 타전된 소식에 잠시나마 기쁨을 공유했다. 그것이 비록 외부로부터의 성과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민족적 습관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존재가 희미해진 ‘한국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생존을 확인하게 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획득했다고 여겨진다. 당사자인 작가 ‘한강’은 줄곧 "자신의 작품들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침 맨부커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이 5월 18일이어서 공교로움까지 더해졌다. 한 사회의 거대한 비극이 역설적으로 소설가의 문학적 바탕을 이루는 것에 기여했음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사회적 죽음'이 예술가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기 쉬웠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도리어 자연스럽게 읽힌다. 또한, 이 지점에서 ‘사회적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불가피한 위력을 실감한다. 안타깝게도 지난주, 또 하나의 '사회적 죽음'이라 할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또 한 번, 죽음으로부터 무언가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건의 이름     


 언젠가부터 ‘실시간 검색어’는 우리 사회를 비추는 가장 즉자적인 거울의 역할을 이행해왔다. 특히 지난주 ‘강남역 묻지마’라고 하는 – 검색어 그 자체만으로는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 하나의 검색어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줄곧 높은 곳에 자리했다. 이와 관련된 사실관계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34세 남성 김 모 씨는 5월 17일 오전 1시 30분 강남역 인근의 한 노래방 공용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을 수차례 흉기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언론은 이 사건을 명명하기 좋은 이름자로, 장소로서의 ‘강남역’과 성격으로서의 ‘묻지마’를 호출하였고, 으레 관련 사실을 접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네모 창에 ‘강남역 묻지마’를 입력할 수밖에 없었다.     


* 5월 18일 자 네이버 앱 화면 캡쳐



 ‘묻지마 범죄’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관계를 찾아볼 수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를 이른다고는 하나, 기실 범인은 특정한 누군가를 기다리며 일곱 번의 질문과 답변을 반복했다.     


“여성입니까?”

“아니요.”     


“여성입니까?”

“아니요.”


.

.


“여성입니까?”

“네.”     


 일곱 번째 질문에 대한 긍정의 대답 이후, 그는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을 저지른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는 분명히 질문했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물었던 것이라면, 범행 대상이 더욱 구체적인 누군가여야 한다. 그저 여성이기만 하면 상해를 입히겠다는 무서운 다짐은, 그가 내면화한 어떤 감정이 하나의 사람을 넘어서는 ‘사회’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사건이 ‘묻지마 범죄’에 부합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이를 명명하는 정확한 이름자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사건의 이름자를 정하는 일은 재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가해자가 누구에게, 그리고 왜 질문을 던졌는가?’이다. 왜냐하면, 유사한 비극이 재현되는 경우에 있어, 그 존재가 같은 답변을 들어서는 절대,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男한의 탄생     


 어떤 대화건 그것의 가능함은 공유한 정보에 대한 최소한의 상호인식을 전제로 한다. 한국이 남성 위주의 사회라는 명백한 사실조차 공유되지 않고서는 여성문제에 관한 대화가 어렵다. 하지만, 「지난주」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의 대화를 원하기에 짧은 설명을 덧붙인다.     


 한국사회에서, 그것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혈연 공동체인 가족은 소위 가부장제라고 불리는 남성 권력이 지배하는 절대적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여성은 낙태의 고비를 넘고 일단 태어난다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후에도, 남성 형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차별적 지위 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개인의 노력으로 학창 시절을 잘 보냈다고는 하더라도 직장에서는 성희롱과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 그리고 유리천장을 마주하게 된다. 다시 엄마라는 이름으로 가정의 주요한 일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개선되지는 않는다. 가사에 비협조적인 남편과 경력의 단절을 부추기는 사회의 무게에, 하나의 사람이 아닌 그저 엄마라는 존재로 짓눌린다. 잠깐의 여유로 켠 TV 속 모습은 더 가관이다. 권력을 휘두른다는 명분으로 TV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넥타이를 맨 남성이다. 그나마 웃고 싶어 돌린 예능 채널에서도 남자 예능인이 떼를 지어 브라운관을 장악한다. 여성 혐오를 게그의 소재로 삼지 않는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겨우 등장하는 여성들은 헐벗은 여자 아이돌이거나, 드라마에서 신데렐라로 등장하여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정치에 있어 ‘기울어진 운동장’은 흔한 수식어구로 자리 잡았다. 보수적 색채를 띠는 정치세력의 지역적, 수적, 우위를 표상하는 이 표현조차 한 번씩은 정권교체나, 제1당의 지위가 바뀐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남녀격차를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이 상황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기보다는 ‘계급의 분화’로 보는 것이 차라리 더 합당하다. 명백한 경계에 거대한 장벽이 놓인 것과 같은 양상인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언젠가부터 ‘여성 혐오(misogyny)’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성 계층화(gender stratification)에 따른 장벽을 부수는 과정에서 들리는 파열음에 다름 아니다. 유지하던 안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남성 일반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처절한 싸움은 ‘우리 같이 미워하기로 하자’는 손쉬운 혐오의 길을 택하기에 이른다.       




        

사회적 죽음     


 다시 강남역으로 돌아간다. 이 나라에서 가장 번화한 장소에서 벌어진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그것을 정의하는 최우선의 단어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의 단면은 쓸쓸하다. 이 사건은 분명 ‘증오범죄’와 ‘정신질환 범죄’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의 정의를 승자로 뽑고야 말겠다는 집념은 사태에 대한 피로감의 증대에만 기여할 뿐이다. 다만 분명하게 주지할 사항은 지극히 순수하게 ‘여성 혐오’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정신이상자인 범인이 그 순간만큼은 명료한 정신으로 남성 여섯 명에 대해 위해를 가하지 않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범인이 "여자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찔러 죽였다"고 진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왜 이처럼 특정 성별에 대한 반대 성별의 증오 범죄가 계속되는가?’라는 문제는 공론의 장에서 거론할 주제로 부족함이 없으며, 이번 사건을 통해 그것을 개진하는 것에도 전혀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 사건 속의 안타까운 죽음이 우리에게 유의미한 해결을 강권하는 사회적 죽음으로서의 의미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 추모의 시작이 된 메세지



 사회적 죽음이라 하면 민주화운동 중 목숨을 잃은 선열이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진 전직 대통령처럼 죽음 자체가 매스컴을 통해 많이 노출된 경우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너무나도 값비싼 목숨이라는 것을 대가로 우리에게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 다른 죽음의 가치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역설적이고 참혹하게도 죽음으로 항변하며, 사회에 던진 숙제를 우리는 간과해서도 안 된다. 가깝게는 세월호가 그랬고, 더 가깝게는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라고 소리 높여 웅변한다.   




            

남성 잉여세대의 탄생과 비극의 구조화     


 또다시 男한으로 돌아가자. 앞서 ‘男한의 탄생’에서 주지했듯 한국 사회의 기저에는 불투명하나마 명징한 성 계층화(gender stratification)의 장벽이 존재한다. 이것은 사회의 급변 속에 다양한 양태로 진화하게 되었는데, 특히 근래에 와서 주목받는 현상은 ‘남성 잉여세대의 탄생’이다. 이에 관해서는 《시사 in》 천관율 기자가 작성한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 / 418호 2015.09.17.〉의 일부를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갈음한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성비 불균형 국가다.

(중략)

2006년까지 무려 24년 연속으로 남아 비율이 자연 성비를 초과한다.
가장 심했던 1990년에는 성비가 116.5까지 치솟았고,
성비가 110을 넘긴 해도 13번이나 된다.
남자 10명 중 1명은 짝이 없는 거대한 남성 잉여세대가 탄생했다.
1983년생은 올해로 32세(올해는 33세)이다.
남성 평균 초혼연령이 32.4세이니, 이 남성 잉여세대의 맏형도 아직 연애 시장에 머물러 있다.
이후로도 4 반세기 동안 남성 잉여세대가 연애 시장에 진입할 것이고 잉여 남성은 시간이 갈수록 누적된다

(중략)

더욱이 남성 잉여세대는 선배들이 겪지 않았던 새로운 환경에 놓여 있다.
오늘날 연애 시장에서 좌절한 남성들은 웹과 모바일이 제공한 초연결 사회에 살며
대단히 간편하게 서로를 발견하고,
여성 혐오를 배양하고 증폭해낼 공간을 온라인에서 확보했다.

(중략)

막다른 골목이다. 남성 잉여세대의 맏형들이 이 막다른 골목에 이제 막 들어섰다.
그 뒤로도 25년 동안 동생들이 줄을 서 있다.     

《시사 in》, 천관율,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 / 418호 2015.09.17.〉 중  ¹

   

 연애 시장에서 수컷의 좌절은 자연스럽다. 생물학적으로도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기에, 수많은 좌절은 그야말로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분노'로 변태 시킨 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통계치를 확보하고, 결국 ‘혐오’라는 이름으로 악성 진화를 거듭한 결과는 결코 이번 사건과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이 심지어 매우 얇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더라도, 반드시 끊어낼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인용한 기사에서 보듯, 그 실을 한 없이 굵게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이미 우리 사회가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선택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인지하는 일의 어려움에 공감한다. 남성은 생리통이나 출산의 고통, 시선 폭력의 모멸감, 어두운 골목에서 남성을 마주치며 느낄 공포, 늦은 밤 택시에서 편히 잠들 수 없는 두려움을 결코 인지할 수 없다. - 물론 여기에 홀로 공용화장실을 갈 수 없다는 사실까지 추가되었다. - 이번 사건 이후 남성 사회에서 당장 목도할 수 있는 현상은 극단적으로 나뉜다. 하나는 갑작스러운 반성문을 읊는 경우이다. 그간의 몰인지에 대한 사과의 표현으로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본인의 위치에 대해 자각하지 못했음을 사과하는 경우이다. 반대는 일반화시켜 자신을 잠재적 살인범으로 규정하지 말라는 외침이다. 이들은 이번 사건이 한 명의 정신질환자가 일으킨 우발적 범행으로 규정하고, 남성 일반을 몰아세우는 것은 또 하나의 남성 혐오라고 주장한다.


 누군가에 있어, 입장의 치환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은 때로는 당혹스럽다. 후자의 경우를 먼저 보자. 이 집단 남성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일차적 발상은 ‘나는 아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코 여성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나를, 왜 흉악범과 동일 선상에 두느냐는 항변이 먼저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이번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일반화만을 걱정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범죄 현장에서 범인이 ‘여성이면 아무나 좋다’는 일반화를 먼저 행했음은 외면하거나, 아예 떠올리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이 영역의 남성 일반은 아무런 논의의 의미조차 던져주지 못한다.     


*** '일간베스트' 등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들이 21일 오후 추모현장인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시민들과 대치하는 모습



 반면, 누군가에 있어 입장의 치환이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진다는 사실 또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전자의 남성들을 보자. 사건의 정의에 대한 논의가 뜨거운 가운데, 일부 남성은 자신의 윤리적 결여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거나, 심지어는 물리적으로 여성을 지켜내겠노라는 선언을 했다. 우선 이 정도의 빼어난 공감능력은 특별한 교육이나 계기가 아니라면, 분명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반성과 다짐은 ‘나는 남성 사회에서도 특별히 다른 존재’라는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비칠 수 있다. 반복하여 주지하지만,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인지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은 남성들의 반성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절대다수의 평균적인 공감 능력을 지닌 남성 일반에게는 '먼저 달아나는 존재'로 비칠 수 있다. 물론 진도가 처진 학생이 느끼는 위화감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다. 다만, 다른 차원의 '나는 아닌데'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일이 사회적 죽음이라는 큰 숙제의 해결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염려를 제기한다. 차라리 방점을 찍을만한 대목은, 이 집단에 속한 남성의 실천이 다음의 단계에 대한 학습의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다음 단계에서 남성의 선택은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남성'이라는 선택하지도 않은 알량한 명분에 기대어, 여성을 ‘반성’ 혹은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여성을 타자화, 대상화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선 젠더 권력을 누리고 있었음을 개인의 차원에서 인정하고, 여성과 함께 공론의 장에 뛰어들겠다는 태도라면 찮은 시작이라 하겠다. 이것은 당신이 고백한 여성으로부터 거절당한 것과는 무관한 문제이다.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진술을 수컷의 종 특성에 기반을 두어, 높은 자존감의 훼손으로 오독하는 순간 재발 방지는 요원해진다. 앞서 살펴보았듯, 시장에서 수컷의 위상은 더욱 저평가될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분노를 사회로 전이하는 와중에 범죄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복기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그 어렵다는, 경험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인식하겠다는 태도를 지니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본래 문명은 본능을 적절히 제어하는 방향에서 형태를 갖추기 때문이다. 미래 사회의 일원이 되는 일이 거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무거운 숙제     


 이 사건은 분명 우리 사회에 무거운 숙제를 던졌다. 사실 존재하던 숙제였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까지 외면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사람 많은 강남역 정도에서, 이만큼 목소리를 모아야만 겨우 바라봐 준다. 그리고 무겁고 어려운 숙제는 무겁고 어렵게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그저 쉽게 처리하고 넘어가려는 구호가 너무나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남혐, 여혐 다 나빠요! 서로 양보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어요!”     


 지금 세계평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모국어를 공유하고 국토를 나눠 밟는 우리가, 우리 사회에 던져진 당면과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부디 쉽게 가려하지 말자! 부디….


**** 이어지는 추모의 물결







참고 사항



¹ 418호 2015.09.17, 시사 in, 천관율,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5월 18일 자, 중앙일보,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시민들 추모 행렬

news.joins.com/article/20046936


*

5월 18일 자, 네이버 앱 화면 캡처


**

5월 18일 자, 서울경제, 강남 여성 혐오 살인남에 희생된 피해자 추모 물결

sedaily.com/NewsView/1KWD2BEYP1


***

5월 21 자, 노컷뉴스, '강남역'의 마스크 일베 "남자가 다 살인자냐"

nocutnews.co.kr/news/4596598


****

5월 20일 자, 조선닷컴, 강남역 뒤덮은 '추모 포스트잇 5000장'

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20/2016052000129.htm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