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지난주
"어딜 가든 삶은 따라온다."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그의 산문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에서, 도시의 삶을 던지고 시골로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이 직언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막연하게 시골생활을 동경하지만, 실상 그곳에서도 거의 똑같거나 심지어는 더 심한 강도로, 삶이라 불리는 역경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풍광이 아름답고, 인심이 좋으며, 저절로 건강해질 것이라는 흔한 신념은 기실, 발전이 더디고, 간섭이 심하며, 주체적인 자기관리의 회피일 뿐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독설로까지 비치는 언사들을 최대한 완곡하게 수용하자면, ‘삶이 이루어지는 그 어떠한 터전도 가볍게 볼 수 없음’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작가가 기술하였다고는 하나,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통용 가능한 문제의식이라는 점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주 가능한 거주지 후보군으로서의 시골이 아닌, 시골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진단이 가능할까? 지지난 주 발생한 신안군의 사건은 지난주를 거치며 시골, 혹은 촌(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요구해왔다. 이 고민의 열쇠를 ‘언어는 세상에 대한 관조가 아니라 삶의 실천과 연동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라는 저명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기대어, 언어의 차원에서 찾고자 한다.
첫 번째 차원
모든 종류의 가치판단이 무례라는 이름의 위태로움을 마주함은 불가피하다. 특히, 누군가가 무언가에 대해 ‘촌스럽다’라고 말할 때, 그의 입이 자리한 세 치 위 즈음의 눈이라는 것이 유독 아래를 향하고 있음은, 자신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높은 위계에 있음을 함의한다는 차원에서 더욱 그러하다. 대체 ‘촌스럽다’는 표현이 지니는 상대적 우위의 연원은 무엇일까? 쉽게 ‘시골스럽다’로 직역이 가능한 이 표현의 지리상 대척적 좌표는 어쩔 수 없이 도시를 향한다. 결국 ‘촌스럽다’는 - 비록 ‘촌스럽다’만큼 흔하지는 않으나 - ‘도시적이다’라는 표현과 대립의 구도를 이루며 ‘낙후’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비록 촌에서 태어났어도 도시로, 서울로 보내야 했던, 혹은 가야만 했던 우리의 집약된 어느 시간은 ‘촌스럽다’에 이처럼 매정한 부정적 심상을 선연히 남겨놓았다.
두 번째 차원
자본 집약의 정도와 기회의 차등이 파생한 세부적 요건들로 ‘촌스럽다’를 정의하는 차원은 차라리 이성적이다. 비록 그것이 폄하의 의미를 내재한다 할지언정, 판단의 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에서의 ‘촌스러움’은 낙후성 판단 이전에 어떤 직관의 영역에 자리한다. 특히 미적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 상대적으로 덜 세련된 것은 어김없이, ‘촌스럽다’는 직언 앞에 발가벗는다. 비록 그것이 도시에 존재할지라도 유행에 지났다고 여겨지면, 화자의 발언에 있어 대체로 누락되지 아니한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국어사전 상에 명시된 ‘촌스럽다’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어울린 맛과 세련됨이 없이 어수룩한 데가 있다. ¹
이 경우의 ‘촌스럽다’는 입지가 중심이 아닌, 감각적 차원으로 치우쳐 있기에 그 반대편에 ‘도시’가 아닌 ‘도회적’을 두게 된다. 곧 ‘세련되었다’에 반(反)하는 모든 경우의 통칭으로 환원된다. 어찌 되었거나 여전히 전혀 긍정적이지가 않다.
그리고 가장 부정적인, 세 번째 차원
신안군에서 일어난 문명에 거스르는 거악에 전율하며, 당연히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에 기여하는 작은 단서들과, 그 정도의 차등을 묻는다. ‘당연한 정도’에 대한 미세한 차등은,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배격하는 정도, 남성 학부모가 여성 교사의 관사에 드나드는 것을 용인하는 정도, 이 비극에 대해 지역 공동체가 반응하는 정도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이 차이는 지역마다 아주 미세한 다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가 가장 둔감한 어떤 지역은 이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날 정도의 가능성 앞에, 딱 그만치 무력했을 것이다.
앞서 논한 ‘촌스러움’의 두 가지 차원이 상대적으로 '도시적'이거나 '도회적'이라는 가치를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면, 마지막 차원의 ‘촌스러움’은 그 자체의 고립이라는 절대적 차원에 우선하여 말미암는다. 그리고 고립의 정도가 차이를 보임에 따라, 상대적 비교치를 획득하게 되고, 결국 더 폐쇄적인 곳이 기이한 양태로 존재를 알려온다. 이 지점에서 ‘촌스러움’은 ‘도시의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라든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원을 넘어, ‘고립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다시 사건이 발생한, 혹은 발생할 수 있는, 그곳으로 시선을 돌려 본다. 상대적으로 더 닫힌계에서, 껍데기만 남은 가부장제에 밀려 집 밖으로 나온 남성들이 지역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입지가 유지되었다는 착란 속을 살아가는 동안, 외부로부터 발령받은 젊은 교사의 어찌할 수 없음을 추측한다. 추악함의 정도를 높여 나가도, 여전히 고립적인 환경에서, 자신들의 만행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자신도 가늠이 안 되었을 지경을 상상한다. 그나마 이런 것이 옳지 않다고 이야기할만한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떠나버린 이후, 남은 사람들의 땅을 생각한다. 갇혀있다. 피해자가 발휘한 놀라운 용기와 강단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두터운 ‘촌스러움’의 수면 아래 갇혀 있었을지 모른다. 신안군이 유독 비 이성과 무지의 지역이라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단지, 아주 작은, 폐쇄, 고립, 그리고 그들만의 논리로 이어져 온 세월이 상대적 ‘촌스러움’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비극은 너무나도 참혹하였다.
다시, 마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로 돌아간다. 작가가 지닌 최초의 문제의식인 ‘시골은 그저 낭만적인 공간인가?’라는 질문을 복기한다. 어찌하여 시골은 낭만의 공간으로 인지되었을까? 우리가 입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그 쉬운 일만으로, 촌을 어머니의 땅으로 편리하게 대상화하며 오직 이미지로 착취하는 동안, 촌은 더욱 고립되며 그 속에서는 괴물들이 자라나기도 하였다. 내부에서의 삶은 알아서 잘 돌아가지 못했고, 결국 진도를 쫓아오지 못한 간극은 또 다른 차원의 ‘촌스러움’을 부각하였다. 우리 모두를 방조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우리는 기여하고 있었다.
현 정권이 들어서는 것이 확정되던 2012년의 겨울, 필자의 가장 큰 염려는 촌스러움의 전 국토화에 있었다. 그저 느낌에 불과했지만, 어떤 의도가 흐름을 타고 전 방위로 확장되는 일이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지는 이 땅에서,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이는 성공한 시절에 대한 기억이 중요하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삶에 있어 가장 높은 수준의 쾌감을 맞보았던 순간, 그리고 그 기억, 우리는 그 기억을 환상처럼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21세기가 12년이나 지난 뒤 출범한 정권의 기억할만한 가장 성공적인 시절이 1970년대라는 사실에 우울함이 해일처럼 밀려왔던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도 누구 못지않게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을 손쉽게 없애더라도, 다른 차원의 성과로 무마할 수 있었던 시간과는 같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알고 있을까? 많은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일사불란하게 뭉치기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이제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해졌고, 예측 불가능성도 증대되었다. 여성 인턴을, 해양경찰을, 고등어를, 여교사 발령을 모두 해체하는 문제 해결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그저 ‘촌스럽다’. 고립이라는 ‘촌스러움’에 대한 대응마저 ‘촌스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촌스러움의 촌스러움’을 경험하는 동안, 언중에 있어 ‘촌스러움’은 대체 언제쯤 부정적인 의미를 벗어던질 수 있을지 더욱 요원해지고 말았다.
참고 사항
¹ 국립국어원, ‘촌스럽다’ 사전적 의미 발췌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
미국 드라마 “언더 더 돔” 이미지
- http://underthedome.wikia.com/wiki/File:White_Dom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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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현장 6월 7일 자, 보도 화면
- 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62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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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투데이 6월 6일 자, 보도 화면 캡처
- imnews.imbc.com/replay/2016/nwtoday/article/3989309_19847.html?menuid=nw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