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지난주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¹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저작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이다. 세계적인 작가에 맞서게 되는 것 같아 두려움이 있으나, 분명 어떤 불행은 가정을 불문하고 닮아 있다. 지난주,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불행에 대해 중형이 내려졌다. 놀랍게도 그 불행은 우리가 모두 사랑해마지않는 존재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난해 9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던 아들의 여자친구를 아들의 어머니가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지난주 4월 26일 열린 2심 판결에서 원심과 같은 12년형 선고가 내려졌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 씨는 자기 아들과 여자친구가 교제하는 것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며 "전화로 언쟁을 벌이던 끝에 아들의 여자친구가 집으로 찾아오자 미리 준비한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고 판단했다. ² 물론 본 사건은 무척이나 극단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닮아있는 불행은 본 사건의 경우에만 머물러있지 않다.
하나의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을 써 내려간다. 대체로 이사(移徙)와 같이 가족 전체가 맞이하게 되는 변화상이나, 구성원 각자의 신변에 변화가 있는 경우에 가족의 이야기는 새로운 장을 요구받는다. 이와 같은 변화가 평이한 호흡으로 읽기에 적절한 ‘발단’과 ‘전개’ 부에 쓰이기 적당하다면, ‘위기’로 독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장면은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출현이라는 사건으로부터 기인하고는 한다. 특히, 한국에서, 전후(戰後) 베이비붐 세대의 자식들이 결혼 적령기를 맞이한 요즘은 그 위기가 ‘절정’으로 치달은 시점이다. 위 사건은 그 흐름 속에서 일어나, ‘절정’의 마지막 페이지에 쓰였다.
가족이라는 소설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본다.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되기 위해 발을 들이는 존재가 여성인 경우, 이 여성은 지금껏 전혀 마주한 적 없는 강력한 연대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비집고 설 자리가 보이지 않는 단단한 결속 앞에서, 결정으로 불리는 허락을 기다리는 시간은 필연적이다. 불허가되는 경우에는 연대의 구성원 중 나이 어린 남성이 결과를 이와 같이 전달한다.
‘엄마가 반대하셔…….’
이 경우 남성은 자신이 선택당한 관계에 선택한 관계를 굴종시키는 끔찍한 어리석음을 선사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여기지 않기에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오랜 시간 충성을 다한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인생에서 최종 결정권조차 쥐고 있지 못한 남성과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으므로 차라리 무척이나 잘된 경우로 볼 수 있다.
반면, 여성이 어떻게든 자신이 설 공간을 마련하고 그 연대로부터 ‘며느리’나 ‘아내’의 칭호를 부여받은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다. 자칫 모자(母子) 연대를 깨뜨린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사실은 아들에 있어 결혼의 의미를 점쳐보면 짐작할 수 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은 도시락을 싸 주면 학교에 잘 다녔고 시험도 잘 보려고 했으며, 대학에도 입학하고 군 생활도 충실하게 했으며, 취직까지 잘했다. ‘아이고 착한 우리 아들’에게 남은 다음 숙제가 바로 ‘결혼’이었던 것이다. 아들은 여전히 모자 연대를 온건하게 유지할 방안으로 ‘결혼’이라는 숙제를 충실히 이행해내야 했기에, 그에 적절한 여성을 찾는다. 이 경우 남성 구성원이 내뱉는 언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 엄마한테 잘할 여자가 이상형이에요.’
결혼이라는 제도의 속성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현상이 부여하는 가장 절망적인 사실은 이런 부류의 발언을 도처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그 자체로 종결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잘할 것 같은 여성과의 삶에서도 남성은 ‘착한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모친과의 관계 속에서 의탁하며 살아온 수동적 몸은 여전히 그 관계 속에서 안정을 누리려는 관성을 부리기에, 결혼을 했다고 한순간에 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안일을 나누자고 한다거나 엄마의 말 보다 나의 의견을 좀 더 존중해줬으면 좋겠다는 아내는 자신이 그간 누려온 안정과 부합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된다. 도리어 손에 물 하나 안 묻히고 애지중지 키워주신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난다. 이 지점에서 효를 빙자하고 사랑을 들먹이며 어머니를 애처로운 대상으로 규정한다. 마침 연대의 결정적인 한 축인 어머니는 비교적 나이가 들어있고, 점점 더 나이가 들어가기에 이 사고의 방식은 지속해서 유효성을 획득한다.
가능한 경우의 수 중 여성이 크게 환영받는 경우를 가정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수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아들’과 ‘우리 엄마’가 구축한 20~30여 년에 이르는 소유와 안락의 강력한 요새 앞에 새 여자의 등장은 단지 적군의 출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사랑하는 것도 욕심이다. 모자 연대에 있어 여성은 이 사실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거나, 아예 인지하지도 못한다. 집착에 가까운 사랑도 아들의 성공이라는 미명 뒤에 숨어버리고, 도리어 헌신이라는 영예를 획득한다. 이런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을 조절하지 못해 아들을 온전히 세상 밖으로 내어놓지 못한 여성에게, 새로운 여성의 존재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여전히 아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상대를 물색하기 위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여성에 대해 아들이 계속해서 받아줄 것을 강권할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악화의 일로를 걷기도 한다. 엄마가 실패하는 지점이다. 결국, 사랑하고 싶은 만큼 사랑한 욕심이 엄마를 실패의 나락으로 인도한다.
다른 차원의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장성한 아들이 안락한 평안을 내려놓지 않은 채, 결혼의 의미조차 고민하려 들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촉발한다. 그저 분란을 원하지 않는 아들이 선택한 무난한 여성에게, 주체로서의 지위는 사치에 불과하다. 배경으로서의 아내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여타의 조건으로 찾아 나설 행복의 의미를 묻는다. 아들은 자신이 아닌 엄마의 기준에 부합하는 여성과 평생을 살아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모친이 사망한 이후에도 부부라는 관계가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것은 모친이 표면적으로나마 내세우고 있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은 탓으로, 엄마뿐 아닌 아들의 실패까지도 동반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도 결국 엄마의 실패는 피할 수 없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본다. 일감이 넘쳐나던 시절 소위 바깥일을 맡은 남정네들이 산업역군의 지위를 획득하고 고속성장을 견인하는 동안, 가정은 따뜻한 밥과 포근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휴식처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 가정을 지키는 소임을 맡은 여성들은 삼시 세끼 따뜻한 밥과 그놈의 김치를 상전하던 것이 당연시되던 삶 속에서 남자를 위한 배경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런 여성들이 최초로 맞본 거대한 성과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고추 달린 자식을 출산한 순간이었다. 이제 이 아들을 보란 듯이 번듯하게 키워내기만 하면 된다. ‘잘 키운 아들’이라는 절대적 성배만을 위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그렇게 자란 아들들이 집에 여자를 데려올 시기가 되었다.
위와 같이 멀리서 보면, 급속 성장이 파생한 기형적 가부장제만이 눈에 들어오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친근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이 일련의 사태에서 가장 지근거리에 있으나, 그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방관자로서의 아버지는 지엄하신 ‘남자가 하는 바깥일’을 수행하며, 성역과도 같은 경제권까지 쥐고 있다. 남자는 원래 집안의 일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고, 감정 표현도 쉽게 하는 것이 아니라며, 섬세하지 못하여 가정에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에 대한 변명까지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아내는 자신이 남편의 배경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강화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으려 한다. 실패를 향해 치닫는 엄마의 뒤편에 등 돌린 한 사내가 우직하게 엄마를 떠밀고 있었다.
이상의 진단이 모든 가정의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너무 옛날의 가정을 상정하여 전개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주지할 사항은 그 일반적인 옛날식의 가정에서 성장한 이들이 결혼이라는 관문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실패가 드러날 수 있는 ‘절정’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 여성으로 태어나 상대적이고 절대적으로 적은 기회를 부여받은 가운데, 자신의 삶을 돌보기는커녕 남성 형제들의 뒷바라지에 차출된 삶을 본다. 통과의례처럼 혼사를 치르지만, 결혼 이후에도 희생의 강요는 이어진다. 당연시되는 집안일과 남편과 자식을 위한 헌신만이 한 여성의 삶을 규정한다. 그런데 이 삶에 있어 유일한 성취였던 아들을 다른 여성에게 넘기게 되는 순간, 삶의 모든 의미가 상실된다.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돌볼 수 없었던 한 여성에게는 어머니라는 허울뿐인 칭호만이 남았다.
이런 어머니에게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하는 것은 폭력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미 떠나보냈거나, 남아있더라도 모든 지위를 상실한 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도 허무만을 양산한다. 결국, 안락을 누렸던 장성한 아들이 나서야 한다. 우선 대화를 할 수 있다. 같이 드라마를 보다가 슬쩍,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데려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물어보는 식으로라도 가능한 불행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어떤 취미생활 같은 것을 제안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제 세계에 심취한 나머지 아들이라는 타인이 가져오는 선택지를 돌볼 여유조차 없게 되는 이상적인 장면을 그려본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아들의 어깨가 무겁다.
유교 가족주의의 전통에 상당 부분 균열이 일어난 시점에서, 더는 이와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는 ‘엄마의 실패’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닮아있는 수많은 불행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방치하면, 지난해 9월의 끔찍한 불행이 남의 이야기에 그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순간 우리 엄마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나는 우리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아들부터 부디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권한다. 우리가 모두 진정으로 사랑하는 엄마를 위하여…….
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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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펭귄클래식코리아, 윤새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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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출처: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160426/77778051/1#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pixabay.com/ko/어머니와-아들-실루엣-어머니의-사랑-1256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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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룸 2015년 9월 13일 자 보도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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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나를 돌아봐 2015년 4월 8일 자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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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궁금한 이야기 Y 2015년 9월 25일 자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