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번째 지난주
“너희들 4학년 여름방학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알아?”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담임선생님이 방학을 앞둔 종례시간에 반 아이들에게 던지는 대사이다. 그 어떤 사람도 담임선생님이라는 역할을 담당하자면 위와 같은 말들을 하게끔 되어있는 것인지, 같은 학교를 나왔을 리 없는 관객들은 언젠가 모든 방학의 시작 즈음에 늘 들어오던 발언임을 상기하고는 이내 웃음을 터트린다. 그랬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보람찬 것이어야 했고, 자칫 보람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시기이건 모든 시간은 가장 주된 것을 위해 일제히 도열했고, 그 이외의 것은 죄다 낭비로 여겨진 탓이다. ‘보람’을 위한 계획표는 언제나 허울뿐이었지만, 항시 우리의 마음을 내리누르는 작용만은 가능했다. 습관처럼 보람에 짓눌리던 우리가, 그런 우리가 자라나 제 손으로 돈을 번다고, 일을 한다고 이러고 있다. 대견하기는 하다.
제법 긴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자신, 혹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양태에 따라 그 차등이 크겠으나, 대체로 일가친척이 오랜만에 모여 ‘반가움’과 ‘어색함’이라는 간극의 사이를 오갔을 수도 있고, 온전히 자신의 계획에 따라 여행이나 여타 방식의 휴가를 즐겼을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꿀맛 같은 휴식이었기를 바라본다. 그런데 여전히 보람을 강박하던 습관 탓으로, 쉬는 것조차 ‘잘 쉬었는지’를 가늠하는 나를 본다. 무언가 뚜렷한 목표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몸에 밴 보람찬 시간에의 갈망을 채우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애초에 보람찰 필요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쉬면 되는 것이었다.
휴가 기간에 잘 쉬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내리누르는 압력은 일터에 있는 시간에 효율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강박이 누르는 힘에 비례한다. 긴 휴일에도 마음을 지배하는 이런저런 일들과 더 합리적인 휴일을 보내야만 할 것 같은 보람에의 강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믿음이 내리누른 마음으로 인해, 그 마음을 감싼 몸은 쉬어도 쉰 것이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잘 못 쉬었어도 괜찮다. 차라리 문제는 여유 없는 마음들에 있다. 놓아두는 방법을 훈련받지 못한 초등학교 4학년 어린아이처럼, 담임선생님이 강요하는 보람에 겁먹은 우리들은 넥타이를 매고 화장을 했을 뿐,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계획표를 보며 한숨짓는다. 그러나 어린 시절 지키지 못한 생활계획표에 의해 어린아이의 인생이 무너지지 않았듯, 우리의 인생도 그리 나약하지 않아, 강박을 내려놓는다 하여 큰일이 나지는 않는다. 마음이 쉬지 못하면, 몸이 쉬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음 정도는 이미 공유된 사실이 아닌가?
언제나처럼 연휴 직후 라디오 프로그램의 첫 인사말은 직장인의 부적응을 예단하며, 높은 확률로 보람차지 않았을 시간에 대해 반성적 자아를 소환하려 할 것이다. 이 우울한 예측이 가능한 이유는 아직도 절대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작용을 소모로만 치부하는 암묵적 믿음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 강요받은 보람이 있다. 그 누가, 그 누구에게든 타인에 대해 담임선생님이 되어 보람을 계량화하던 습성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타인의 보람을 측량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필자는 그것을 ‘존중’에서 찾고자 한다. 이제 내일이면, 그 안락하다는 이불을 박차고 일터로 나온 사람들과 지하철과 버스에서 조우할 것이다. 그것은 흔히 농담처럼 소비되지만, 실상 대단한 것이다. 나의 힘듦을 투사하여 타인을 바라다보면, 분명히 대단하게 보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알 수 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이다. 그저 당신도 어디에선가 힘들었을 수 있음에 대한 여지를 두는 일이면 충분한 것이다.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며 시작한 한 주는 하늘의 달님께 소원을 비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명절과 주말이 이어진 긴 연휴는 우리에게 일상 밖의 관계나, 일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를 재확인시켰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이만 들었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자신을 보고 괜히 더 우울해지지나 않았기를 바란다. 어쭙잖은 위로의 말을 건네려다 접는다. 다만, 지진을 느끼며 우리의 터전이라는 것의 연약함과, 심지어 땅도 흔들리며 존재하는데 우리의 인생인들 뭐 그렇게 안정되기만 하겠느냐는 상념이 들었음을 전한다. 결국, 땅이 흔들려도 여전히 땅이듯, 내가 흔들려도 나는 나로서 아직은 어린 나를 내가 사랑하는 수밖에는 없다. 나를 속박하던 보람에의 굴레는 벗어던지고, 타인의 시간을 존중하며, 언제라도 나를 놓지 않는다면, 그저 나이 드는 것이 아닌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으며, 잠시 멀리 두었던 일상을 다잡는다.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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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닷컴 매거진, 2015년 12월 22일 자, “선생님이 콕콕 집어주는 생활계획표 클리닉”
- 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5/12/22/20051222000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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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ylorhage.com/2011/05/10/a-heavy-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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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scientist.deviantart.com/art/Restart-life-556957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