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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May 21. 2017

새 나라, 새 환경, 새 영화_<서울환경영화제> 스케치

예순세 번째 지난주




새 나라, 새 환경, 새 영화!


 New is always better! 미국 시트콤 <How I Met Your Mother>의 Barney Stinson(닐 패트릭 해리스 분)은 걸핏하면 새로운 것이 언제나 더 좋다며 호방하게 외쳐댄다. 전혀 틀린 말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옛 것, 아니 너무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발현의 시점이라는 기준만으로 우위를 구분할 수는 없는 일이겠다. 그런데 무려 14회째를 맞이한 어느 영화제의 캐치프레이즈가 <새 나라, 새 환경, 새 영화>란다. 새 술도 새 부대도 아닌데 말이다. 어째서 이토록 ‘새(new)'를 강조한 것일까?


 <서울환경영화제> 개막식이 있던 날 오전, 시선과 마음들은 광주로 향했다. 1980년 이래로 단 한 순간도 새로울 수 없었던 그 아픔의 시간이 기이하게도 새롭게 전해져 온 탓이었다. 분명 광주의 슬픔은 오래되었으나, 그 호명함은 새것이었고, 그 노래 또한 새로웠으며, 포옹이야말로 새 시대의 그것이었다. 우리는 새로움을 느꼈다. 광주로부터 전해진 새로움의 기운은 봄기운처럼 상경하더니, 이내 <서울환경영화제>를 찾아왔다. 그러자 지난겨울, 차디찬 광장의 바닥에서 노숙하며 싸워온 영화인들이 비로소 몸과 마음의 해빙을 거쳐 영화제에서 모였다. 겨우 토요일의 몇 시간 동안 초 하나를 보태던 나는 영화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관객석에 앉았다. 그렇게 광장에서 촛불로 만나던 우리가 비로소 영화를 통해 다시 만난 것이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지만, 혹여나 어느 한순간이라도 삐끗했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모습으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던 그런 만남이었다. 우리는 그 처절했던 시간을 다 알고 있고, 자랑스럽게도 견뎌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났다. 이 만남을 어찌 새것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나! 새 나라를 맞이하여 새 환경을 마주한 우리가 드디어 새 영화로 만났다. 그렇게 <제14회 서울환경영화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새롭게 시작되었다.


※ 예순세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는 <제14회 서울환경영화제 The 14th Green Film Festival in Seoul>의 스케치 및 간단한 영화 리뷰글입니다. 본 글은 ‘브런치팀’과 ‘서울환경영화제’의 초청으로 영화제에 참석하여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브런치팀’과 ‘서울환경영화제’ 측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던


 시인 백석은 시(詩)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¹ 에서 잔잔한 잠풍 날씨가 너무 좋은 날, 세상의 짐 진 바를 잠시나마 외면하고 거리를 걸으며 행복을 느낀다. 의도적 ‘외면’이라는 비일상적 시도를 통해 역설적으로 일상의 행복이라는 발견을 전해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질주하는 삶 속에 던져진 우리에게 잠깐이나마 ‘외면’의 가치를 일깨운다. 이렇듯 ‘외면’을 통해 심리적 평안을 얻는 일련의 의도와 시도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외면했던 모든 사태를 마주하는 지경에의 경각(警覺)의 마음도 염두에 둘 것을 감히 권한다. 이는 지난주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태양이 내리 쬐인 빛들이 지구에서 에너지가 되었을 때, 최초에 태양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고르지 않게 사용되는 현상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외면하던 실제들이 <서울환경영화제>라는 축제의 장에서 나를 엄습해온 탓이다. 이것은 물론 일방적으로 무겁거나 아프지만은 않았으나, 쓰지 않던 뇌의 어떤 근육을 자극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개막작 _ <유령의 도시, City of Ghosts, 2017>


* 영화 <유령의 도시> 포스터


 주변이 대체로 황톳빛인 가운데 총성이 들려오고 사람들이 오열하는 모습은 이미 그 자체로 배경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 국경선을 일일이 알지 못하며, 누적되었다는 갈등에 관하여는 키워드들만으로 간신히 맥락 화할 뿐이다. 이런 가운데 어떤 사태가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빌려 그 삶을 깊게 비추어오면, 덮어두었던 나의 외면에도 그 빛이 새어 들어온다. 그제야 아프다. 그런데 우리도 비슷한 아픔이 있었다. 비통한 지경을 밖으로 호소할 수조차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마침 공교롭게도 우리의 비극이 고립되었던 5월 18일이라는 시간에 슬픔을 뚫고 진실을 알리려 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개막작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의 상태를 오묘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영화 속 익명의 운동가들을 응원하며, 마음속 광주에의 부채를 조금이나마 탕감하려 하며 <서울국제영화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앵그리 이누크, Angry Inuk, 2016>


** 영화 <앵그리 이누크> 현장 제작 포스터


 이미지는 얼마나 잔혹한가! 새하얀 얼음 위의 시뻘건 선혈이라는 고 대비는 두 번 생각할 틈 따위는 용납하지 않은 채 우리에게 피아의 식별을 주지 시킨다. 게다가 촉촉이 젖은 눈망울을 한, 인형 같은 존재의 죽음은 어떤 인지가 쉬움을 넘어, 동류의 목소리를 모으는 작용까지도 수월하게 만들어버린다. 태초에 타고나기를 사회적 동물로 나고 자란 탓으로 일련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부정적 언사를 뱉음은 적절치 않겠으나, 쉽게 모인 사람들을 두고 높은 단상 위에 올라 수월하게 지지를 확보하는 행보는 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나는 외면했었다. 그 쉬운 정치적 목소리가 어떤 삶의 생존을 억압했는지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외면하였음이다. 그리하여 영화 <앵그리 이누크>는 ‘환경’이라는 타이틀만을 두고 심지어 영화제까지 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각한다. 우리의 ‘환경’은 이미 일차적인 감정이나, 물려받은 가치에만 의탁할 수 없으며, 그것의 반대편과 그 이면의 삶과 자칫 누락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시선이 도달해야 함을 역설한다. 환경의 문제도 이제 간단하지 않다. <앵그리 이누크>의 호소가 탁월하게 전해지는 이유이다.





<시린의 노래, Poets of Life, 2017>


** 영화 <시린의 노래> 현장 제작 포스터


 풍경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그것이 대상으로 존재할 때와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왔을 때는 철저하게 다르다. 어떤 강인한 여성이 풍경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전해지는 영화 <시린의 노래>는 ‘환경’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우리가 영화제의 이름으로 ‘환경’을 내세우리만치 그것의 범위는 넓고 논의의 대상도 다양할 것이나, 종종 우리는 그 속에서 단 하나의 존재를 누락한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하여 ‘환경’이라 하면 자연경관, 동물과 식물, 목가적인 풍경 등으로 대체하여 소비함에 익숙하다.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그렇게 ‘환경’을 적절한 수준에서 재단하여 외면할 부분과 아닌 부분을 나누어 인식하고는 한다. 하지만 ‘시린’은 태어나고 자란 풍경과 환경을 사랑하며 있는 그대로 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신까지 ‘환경’ 속에 포함시킨다. 이는 농업, 여성운동, 개발주의 등의 문제로 확장하며 자신뿐 아닌, 공동체와 미래의 문제까지도 포괄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환경’이 단지 보존하고 가꾸는 대상이 아니라, 곧 우리임을 자각할 때의 그 삶을 나는 참으로 감사히 엿보았다.


*** 영화 <시린의 노래> 시린 바그나바드 감독과의 게스트 토크





<플라스틱 차이나, 塑料王國, Plastic China, 2016>


** 영화 <플라스틱 차이나> 현장 제작 포스터


 지금 내 앞에도 플라스틱 생수병이 있다. 나는 신경을 쓴다고 써서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 <플라스틱 차이나>에 따르면 이것은 중국의 어느 플라스틱 재활용 공장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영화 덕분에 그릴 수 있게 된 그림들이다. 내가 버린 플라스틱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들이닥친 플라스틱의 산속에는 아이들이 노닌다. 아이들은 침출수로 죽은 물고기를 잡아 나눠 먹기도 한다. 온갖 환경세를 떼어가는 정부로 인해 일을 해도 소득은 변변치 않다. 그나마 미래를 단단히 붙잡고 있을 만치의 의지가 아니면, 여전히 술이 가깝다. 술보다 멀어진 어린 딸은 유치원도 못 간다. 버스비가 없어 고향에도 못 간다. 여기까지의 감상은 그저 불우함에 대한 성토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과학책을 열어본다.


 열역학 제1 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즉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 절대 변하지 않음을, 제2 법칙은 대부분 자연현상의 변화는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만 진행함을 규정한다. ² 지구적 차원의 총에너지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가운데, 자원에서 쓸모없는 무질서들로의 폐기는 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 대표적 종착지는 바로 중국이다. 그런데 무질서도는 계속해서 증가한다. 이미 그렇게 되어있다. 변변한 먹고 살 방편이 없어 그나마 세계의 쓰레기를 처분해야 하는 삶 속에, 온갖 무질서들이 쌓여만 간다. 그 삶 속에 멋들어진 새 차는 물론이거니와 기본적인 교육과 건강의 문제마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런데 당장 나부터 플라스틱을 아예 사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중국으로의 일방적 흐름을 막기도 쉽지 않다. 그렇게 <플라스틱 차이나>는 나의 외면을 가장 아프게 들추었다. 이 예정된 비극의 방관자로 살아가지 않는 최소한의 방책으로 영화는 그 마지막을 빌려 #lessplastic라는 해시태그로 호소해 온다. 적어도 이 영화를 많은 사람이 나누어 보고 외면의 저편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랫 필름, Rat Film, 2016>


** 영화 <랫 필름> 현장 제작 포스터


 도시는 유기체라고 일컬어지고는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다볼라치면 실제로 그러하다. 생명이 태어나 변통을 겪다가 소멸해가는 지경을 도시라는 장소도 그대로 답습하기에 가능한 주장이다. 하지만 영화 <랫 필름>이 바라다보는 범위는 그보다는 좁다. 우선 한 도시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지형 위에 그어진 선은, 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경계에는 꽃이 피기보다는 선이 그어지고 구획이 나눠진다. 사람들의 구분은 오랜 시간이 자나도 그다지 변화가 없다. 영화는 그 하부를 유유히 거니는 존재에 주목한다. 바로 쥐다. 그런데 이 쥐라는 것도 사람의 사는 모습에 따르기를 그치지 않아, 더 어둡고 더 음습한 공간만 있다면 기꺼이 거처를 마련한다. 인간의 세계가 복지 등의 시스템을 외면하여 균등을 저버리고, 피부색 등으로 갈등할라치면 쥐는 신이 나서 어두운 곳의 존재에서 공생한다. 도시는 마치 게임 속 화면처럼 창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시의 창조자도 의도하지 않았던 쥐의 생태는 인간의 경계를 비웃는다. 경계의 삶을 이어나가면서도 거대한 쥐를 때려잡고서는 호쾌하게 미소 짓는 사람들은 그저 나의 모습이자 우리 이웃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에 있어, 쥐 또한 우리의 이웃일 수밖에 없다.





<익명의 정자 기증자, Donor Unknown, 2010>


** 영화 <익명의 정자 기증자> 현장 제작 포스터


 ‘환경’을 서정적으로 은유하자면 단연 ‘관계’나 ‘연결’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미풍도 나를 거치지 않음이 없고, 내가 처한 지경도 결국 나로 인해 말미암았다는 수사는 흔하다. 그런데 영화 <익명의 정자 기증자>는 아주 직접적인 연결망을 들춘다. 그런데 어떤 한 축이 가려져 있다. 바로 ‘익명’이라는 이름 없음의 이름으로 인함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관계의 거리를 줄여나갔고 결국 한 존재로 이어진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관계 찾기’가 인터넷의 발전 따위로 넘길 만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가 아닌 이름 모를 남성의 정자로부터 삶을 부여받은 이들에게는 당장 사회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지점에서의 혼란과 부모에 대한 배신감, 이후 나의 관계 맺기에 대한 불안함이 동시에 엄습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 <익명의 정자 기증자>는 이를 운 좋게 비켜선다. 바로 정자 기증자로 인함이다. 이 자유롭고도 유쾌한 남성의 세계관은 곧 150번 기증자를 선택하게 한 이유였으며, 훗날 이토록 애매한 관계로 다시 만났음에도 그를 닮은 자녀들과의 만남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우리가 외면한, 하지만 흥미로우면서도 나름의 문제의식을 동반하는 관계를 보여주었다는 성과에 더하여, 또 다른 경우들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욕구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속편이 있으면 안 되는가? 모르겠다. 나는 들은 바 없다.


*** 영화 <익명의 정자 기증자> 제리 로스웰 감독과의 게스트 토크 









곁에 두다.


 이옥섭, 구교환 감독이 제작한 트레일러 <Girls on top>은 두 사람과 선인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조금만 의역하자면, 의도적 외면에 관한 반성문으로 읽을 수도 있다. 내가 사랑해줄 방식과 범위, 그러니까 자신의 욕망에 근거하여 대상을 설정해둔 채 자신의 욕심만치 사랑해줄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쉽게 놓고는 한다. 그런데 <Girls on top>은 대상이 꼭 말 못 하는 선인장이어서가 아니라, 실지로 상대의 바람을 있는 그대로 읽기보다는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만치, 그리고 사랑하고 싶은 방식대로 사랑하고자 하는 우리를 꼬집는다. 애써 외면하며 마음의 부채를 덜어, 자신의 평화를 확보하는 방식을 들춰내는 것이다.


 물론 앞서 백석의 시를 거론하며 논하였듯, 외면하며 안식을 얻는 태도에 잘못이 있음을 주장함이 아니다. 단지, 외면하였던 모든 사태를 내가 아닌 상대의 관점에서 바라다볼 것과 외면하기보다는 곁에 두는 훈련을 해나가는 일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것이다. 마침 <새 시대, 새 환경, 새 영화>를 외치며 다가온 <서울환경영화제>의 영화들은 일제히 아예 외면하기보다는 바라봐줄 것을 호소한다. 선인장을 안아줄 수는 없어도 곁에 두는 일, 그렇게 외면하지 않고 나의 의식 곁에 두는 일의 실천이 이처럼 좋은 영화들로 시작될 수 있다. <서울환경영화제>는 오는 24일(수요일)까지 계속된다.



서울환경영화제 티켓 안내 바로 가기

http://www.gffis.org/m34.php





참고

¹

 - 백석, 고형진(엮음) 지음, “정본 백석 시집”, 문학동네, 2007

 - (하단 전문 수록)


²

 - 두산백과, “엔트로피”

 - terms.naver.com/entry.nhn?docId=1125759&cid=40942&categoryId=32233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제14회 서울환경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포스터 및 트레일러”

 - gffis.org/m13.php


*

 - 네이버 영화, 영화 <유령의 도시> 포스터

 - 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9181


**, ***

 - 현장 제작 포스터, 감독과의 게스트 토크 모두 직접 촬영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1912~95)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 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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