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어릴 적에 난 소심하고 말이 없는, 또래 아이들과는 생각하는 게 조금 다른 아이였던 것 같다. 덕분에 '왕따'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도 전에 경험을 해야 했던 것 같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배신과 외면에서 오는 상실감은 아마 나의 무의식에 깊게 파인 상처가 되었으리라.
그 상처는 내게 하나의 강한 욕구를 품게 했다. 사람들 사이에 속하고 싶은 욕구, 소속되고 싶은, 함께의 욕구. 그리고 그 욕구는 튀는 말과 행동, 생각, 밝고 활발한 성격 등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정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테니까. 말하자면 예능에서 연예인들이 (그것이 자기 성격과 비슷하든 전혀 다르든)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하듯, 나도 사람들 속에서 나만의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게서 나온 모든 것이, 어떤 의도로 나온 모습이든, 소중한 나의 모습이다.
함께이고 싶은 욕구 덕분인지, 내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어딜 가나 모두가 인식할 정도로 튀는 존재감을 가졌고, 나를 좋아하는 비교적 소수의 사람과 나를 싫어하는 비교적 다수의 사람 사이에 나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주위에 사람이 많은 데에는 나의 노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외롭고 싶지 않은, 혼자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항상 내가 먼저 연락하고 안부를 챙기며 약속을 잡았다.
나이가 들고 사람들은 바빠졌다. 각자 자신의 작은 테두리를 넘어선 사람들과의 연락과 만남은 작지만 꽤 의미 있는 투자가 필요한 일이었고,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버거움이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많은 관계들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나의 바쁨 사이에도 상대에게 맞추어 나의 모든 일정을 조율하고, 그렇게 사람들을 만났다.
어느 날, 그 모든 게 허무해졌다. 내가 원했던 함께의 느낌과는 조금 다름을 인지했다. 억지로 혼자 붙잡고 있는 관계는 오히려 나를 더 외롭게 했고, 서서히 지치게 했다. 그런 깨달음 속에 짧은 글귀를 하나 적었다.
애써 노력해서
겨우 붙잡아 둔 사람이 아닌
잠시 손을 놓고 있을 때에도
내 곁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해야지.
진심이었다. 나와의 관계에 대한 의지가 없는 이들을 억지로 붙잡아 두며 소모되는 나의 기력이 더 이상은 감당이 되지 않았고, 더욱 외로워지는 마음은 오히려 아프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먼저 누군가에게 연락하기를 그쳤다. 애석하게도, 그때 나에게 먼저 연락을 준 이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게 내 관계도의 현실이었다.
문득, 이 모든 생각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에게 마음을 쓰는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는 '내 곁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반대로 내가 '애써 노력해서 붙잡는 사람'이 될 수 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 대한 어떤 좋은 마음을 가지고 나와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럴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관계는 어렵다. 무조건 받기를 기다려도 안 될 것이며, 그렇다고 다 주다 보면 소진되어버리고 만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곁을 지켜주는 이가 누구인지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많은 관계들 중 어떤 관계들에 나의 제한된 노력을 쏟을 것이냐의 선택일 것이다.
주위를 본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내가 정말 가깝게 지내고 싶은 사람을 구별해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의 노력을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