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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뒤하늘 Mar 29. 2017

사랑하자.

   우리가 하는 많은 대화들 속에 '사랑'만큼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많지 않다. 사랑(과 이별)은 언제나 우리가 흥얼거리는 노래의 주제가 되어 주었고, 전쟁이나 SF 영화에도 러브 라인은 존재할 정도로 사랑은 우리 감정 깊은 곳을 건드린다. 심지어 내가 믿는 종교의 핵심이자 본질은 사랑이라고 하니, 나에게는 더 큰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구분하자면 사랑에도 종류가 있다. 남녀 간의 사랑으로 대표되는 듯 보이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우정이라 불리는 친구 간의 사랑, 그리고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 또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나를 향한 사랑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사랑들의 특징은 관계성에 있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주는 사랑을 거부할 수도, 받고 싶은 사랑이 결여될 수도 있다. 나를 향한 사랑 역시 관계성을 갖는다. 나와 나 사이의, 생각보다 먼 관계성이 분명히 존재함은 나중에 다루도록 하자.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이 죽기 직전의 순간을 맞을 때 생각하는 것은 그가 한 일이나 이룬 성취, 간 대학의 이름이나 성공한 프로젝트, 혹은 채 마무리하지 못한 일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미안한, 고마운 이들에 대한 감사와 후회 같은 것들이라고. 그 말에 동의함과 동시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내가 마주한 후회가 그저 관계에 국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 내가 누리는 취미를 사랑하는 것, 내게 주어진 하루를 사랑하는 것 따위의 사랑이다. 이 사랑들은 앞서 언급한 사랑들과 다르다. 상호관계 속 사랑이 아니기에 주고받음도, 거절도, 결여도 없다. 그저 내가 무언가를 열정을 가지고 몰입하여 좋아하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이런 사랑 역시 우리 인생에서는, 위의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우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법을 잊고 살았다. 아주 어릴 적,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그때 이후로, 내가 원하지 않는 것 - 공부, 숙제, 편식하지 않는 것과 같은 - 들을 '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들을 사랑하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하지 않으면 어떻게 혼날 것인지에 대해 말해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법을 잊고 살았다.

   이러한 것들을 사랑할 때,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는 사람들과 함께 다른 것들이 우리의 눈 앞을 스칠 것이다. 뭐, 지금 우리에게 마지막이 중요한 건 아니다. 당장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혹은 해야 하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 삶의 질감이 완전히 달라질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사랑은 '나를 향한 사랑'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렇게 커져가는 나를 향한 사랑이 내 주위 사람으로, 부모로, 자녀로, 연인로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을 향한 사람 역시 그 사람에게 열정을 가지고 몰입하여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받음과, 거절, 결여와 상관없이 말이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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