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온뒤하늘 Mar 07. 2017

그때 그 사랑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멍을 때린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쯤 되는 이 시간, 몽실 거리는 꿈같은 감성의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이 시간에 마지막 감성을 살며시 붙잡아 본다. 무슨 글이 쓰고 싶은지 몰라 머릿속을 방황하다가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이건 아주 오래전,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랑 이야기이다.

   그녀는 처음 본 순간부터 매력적이었다. 단아하게 묶은 머리와 수줍게 웃는 미소, 하얀 피부에 이쁜 얼굴. 첫 만남부터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매력은 대화를 할수록 드러났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현모양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인, 조근조근하는 말들 속에 담은 상대를 향한 배려와 그럼에도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전달할 줄 아는 사람. 그녀와 대화를 하다 보면 꽤나 마음의 벽이 단단한 나조차 자연스레 무장해제가 되어버렸다. 

   나이가 같았던 그녀와 나, 그리고 또 하나의 친구는 거의 항상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 만남은 항상 즐거웠다. 그녀와 친구, 모두 유쾌한 사람들이었고, 동갑이라는 동질감도 한몫했던 것 같다. 외로우려면 한 없이 외로울 수 있는 - 우중충한 날씨에 더 증폭될 수 있는 - 환경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의지했다. 둘은, 특히 그녀는 그곳을 참 힘들어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처음 봤던 그녀의 눈물도 그곳의 우울하고 치열한 환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점점 그녀가 좋아지는 나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곁에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어딘가 먼 곳에 - 어딘지 관심도 없었으므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한국이었겠지? - 있는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마취된 듯 먹먹했고, 종종 남자 친구와 싸웠다며 고민을 이야기할 때면 유치하게도 김경호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나 지오디의 네가 있어야 할 곳 같은 노래가 머리에 맴돌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위로의 말 몇 마디를 던질 뿐, 진심을 다했다가는 어떻게든 그녀가 그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방향으로 몰고 가게 될 것 같아서, 꽤나 설득력 있게 그렇게 해버릴 것 같아서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10월에 시작된 학기 초에 처음 만나 이런저런 추억거리를 만들던 우리 셋은 점점 가깝고 편해져 갔다. 분명 좋은 친구가 되었다.

   2월이 가까워오던 1월의 어느 날, 그녀가 남자 친구와 헤어졌고, 나는 이기적 이게도 그녀를 위로함과 그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를 재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러 발렌타인데이가 왔고, 그녀는 밥을 해주겠다며 - 유학생들에게 밥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정말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 나를 초대했다. 

   이전에도 둘이 본 적은 많았지만 그 날은 왠지 특별했다. 아무리 그래도 발렌타인데이였고,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둘이 만나는데, 라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초콜릿과 장미 한 송이를 샀다.  돌이켜 보면, 여자 친구를 만나도 꽃은 쓸모가 없다며 선물하기 싫어했던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녀가 꽃 한 송이 받으면 좋겠다는 식의 흘리는 말을 기억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익숙한 그녀의 기숙사 부엌에 도착해 꽃과 초콜릿을 건넸고, '그래도 발렌타인데이니까..'라는 말을 흘렸다. 사실 그 꽃은, 그 초콜릿은 그녀를 향한 나의 간접적인 마음의 표현이었고,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라는 표정을 지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맛있는 밥을 해줬고, 언제나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남자 친구와의 헤어짐으로 그녀와 나의 관계가 '가능성'이 되자, 내 마음은 더 커져갔다. 그때,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마음을 돌려받지 못한다 해도,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그녀를 사랑함으로 나의 온갖 감정의 파편들이 쓸데없는 곳에 소모되지 않고 온전히 그녀에게만 집중되는, 그로 인해 감정적이고 정서적으로 중심이 잡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 주위에 누군가가 없어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도 그녀가 없음 때문임을 느낄 때, 아 정말 내가 그녀를 많이 사랑하는 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관계 속에서 항상 더 주는 사람이었다. 더 착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더 상처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내가 사랑하며, 받기를 바라지 않은 채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주는 것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어색한 것이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자꾸 잘해주니까 내가 더 못되지는 것 같다고. 너랑 있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싫다'고. 관계 속 누군가 이기적이고 누군가는 이타적이어야 한다면, 누군가 더 희생하고 누군가는 그 호의를 받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이타적으로 모든 걸 희생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사랑은 희생이라 배웠고,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땐 언제나 달려갔다. 새벽이든 아침이든 상관없이, 학교 수업이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달려가 그녀의 필요를 채워주려 노력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방에도 들르지 않고 그녀를 보러 간 기억도 많이 있다. 그것이 나에겐 기쁨이었으니까. 같이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하고, 장을 보러 가고, (항상 그녀가 해주는) 밥을 먹고, 소소한 그녀와의 추억들이 쌓여가는 게 마냥 기뻤다.

   아마 그녀도 나의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발렌타인데이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눈치를 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한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를 좋아하기 시작한 지, 아니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된 후에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다. 밝고 적극적이 여보이는 나이지만, 사실 속에는 너무나 여리고 소심한 아이가 살고 있기에, 그 용기를 내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의 나를 향한 감정도, 나 만큼의 강도는 아니지만, 나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만남을 시작할 수 없을 만큼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졸업을 했고, 우리의 추억이 곳곳에 담겨 있는 그곳을 떠났다. 

   왜 갑자기 그녀가 생각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사랑은 하는 것이지,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라고 말할 땐, 그저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에서 그치면 된다. 그 사랑을 돌려받기 위해, 아니 내가 준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돌려받고 싶은 욕심에 상대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이선희 님의 노래 가사처럼 '주는 것 만으로 벅찬' 사랑을 하자.
그리고 '주는 것 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는' 기적 앞에 감사하자.
그 사랑을 돌려받지 못해 아파하며,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많이 있으니까.


그때, 그곳의 우리가 그리운 새벽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