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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다비드 중 다비드를 택했다

애절한 남편을 두고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향하다

by 콩딘이

먼저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나는 지적 허영심이 있다. 다른 분야는 아니고 예술 작품 한정이다. 미술 전공자는커녕 문외한에 가까우면서, 꼬박꼬박 국내에서 열리는 유명한 서양 미술 전시를 찾아다니면서 보는 식이다. 미술관에 가기 전에는 전시를 좀 더 잘 즐기고 싶어서 그 전시회의 메인 예술가나 작품에 대해서도 미리 공부하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허영심이라고 해서 내가 배운 지식을 주변에 뽐내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이건 나만의 고상한 취미로 남겨두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되도록 티 내려하지 않는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얄팍한 지식이 드러날까 두렵기도 하고, 혹여라도 나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오해하면 민망할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그저 서양 미술사를 공부하고, 작품 안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찾는 걸 즐길 뿐이다. 그렇게 한참 전시를 관람하고 나면 마음속에 무언가 채워지는 것 같아 좋은 기분도 들고.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미술관이었다


이런 내가 이탈리아에 간다고 했으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유명한 미술 작품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매체나 책자에서만 보던 명작들의 원본을 실제로 내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카라바조 등. 이탈리아 현지 미술관에만 고이 모셔져 있는 작품들을 내 눈에 직접 담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이탈리아 여행을 기대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혼자 떠나는 것이 아닌 만큼 미술관에 대한 내 욕심은 절반으로 줄여야 했다. 미술관은 도시마다 유명한 랜드마크가 되는 곳 1곳씩만 방문하기. 그게 규칙이었다. 밀라노, 베니스, 로마에서는 괜찮았다. 그런데 문제는 피렌체에서 생겼다. 공교롭게도 피렌체에는 우피치 미술관과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있었던 것이다. 우피치에는 카라바조와 보티첼리가 기다리고 있었고, 아카데미아에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를 포기했다가는 한국에 돌아가서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남편과 부모님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피렌체에서 미술관 2곳 방문이 가능할지. 물론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우피치는 다 함께, 아카데미아는 나 혼자만 다녀오기로.


사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남편의 허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야 우리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거야 별문제가 아니었지만, 남편에게는 장인 장모님과 보내는 3시간의 자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내 없이 셋이서. 거절당할 각오로 물어봤는데, 남편은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내게 다녀오라고 했다. 그 시간 동안 자기는 우리 부모님과 이것저것 하면 된다면서. 그래서 맘 놓고 티켓을 예매할 수 있었다.


나 없이 남편과 부모님만 하는 자유 관광, 괜찮을까?


그런데 막상 피렌체에 도착하니 남편은 조금씩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나 없이 우리 부모님과만 있는 게 너무 어색할 것 같다는 거였다. 생각해 보니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남편에게 우리 부모님은 인자한 어르신들일 뿐이었다. 그저 생일이나 명절에만 가끔 만나서 덕담을 나누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이. 그런데 해외여행은 달랐다. 24시간 내내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남편도 점점 우리 부모님의 성격을 파악해 나가고, 조심해야 할 것들도 알게 되면서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카데미아 투어가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오자 갑자기 남편은 나에게 지금이라도 투어를 취소할 순 없을지, 아니면 자기도 함께 투어에 갈 수 없을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혹시나 싶어 가이드분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일 티켓 모두 매진이었다. 내 손을 붙잡고 어떻게 하냐며 쳐다보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다비드인가 남편인가. 그리고 고민 끝에 나는... 다비드를 택했다. (미안해 남편...) 3시간만 떨어져 있는 건데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고, 장장 13시간을 날아와서 이탈리아까지 왔는데 다비드를 보지 못하고 간다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결국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남편은 겉으로는 잘 다녀오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눈빛은 불안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히려 엄마 아빠는 나에게 흔쾌히 잘 다녀오라고 했다. 시차 적응 때문에 내내 피곤했던 아빠는 이 기회에 카페에 가서 눈 좀 붙여야겠다고 하셨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얘들한테 전시를 많이 보여줬더니, 얘가 이런 걸 보는 걸 좋아한다니까"라면서 은근한 자랑 섞인 말을 했다. 나란히 서서 내게 손을 흔드는 세 사람을 보며 잘 쉬고 있으라고, 금방 보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적당히 즐기다가, 다빈치만 중점적으로 보고 빠르게 돌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투어를 마치고 부모님과 남편을 다시 만나다


그런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카데미아 투어를 신청한 사람이 나뿐이었다. 가이드는 내게 이렇게 된 김에 프라이빗 투어를 해주겠다고 했다. 기다리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면 투어를 일찍 끝내달라고 해야 했지만, 나의 지적 허영심이 그 입을 막아버렸다. (또 미안해 남편...) 단독으로 듣는 투어는 훨씬 더 재미있고 유익했다. 질문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궁금한 것을 더 깊게 물어볼 수도 있었다. 특히 가이드분이 미술사를 전공하신 분이라서 작품 외적으로도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다비드 조각상.

전시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드디어 다비드 조각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이드는 먼저 작품을 눈으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줬다. 내 몸의 몇십 배는 되는 커다란 조각상을 중심으로 원을 돌면서 하나하나 뜯어보는데, 그 거대한 조각상이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이 생동감이 넘쳤다. 눈앞에 커다란 거인이 서 있는 느낌이라 무섭고 오싹하고, 압도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조각상을 남길 수 있는지, 이렇게까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인지 놀라웠다.


그때 스마트폰 진동을 느꼈다. 꺼내보니 남편에게 이미 여러 개의 카톡과 전화가 와있었다. 미술관은 재미있냐, 우리는 카페에 왔다, 언제 오냐, 끝나자마자 와라, 미술관 앞에서 기다리겠다 등등. 이제 투어 시간도 끝나가고, 슬슬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았다. 다비드를 끝으로 마치려나 싶었는데 가이드가 갑자기 내가 그림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으니 서비스로 최근에 열린 특별 전시실도 가이드해주겠다고 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지적 허영심이 넘치던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갔다.


그렇게 특별 전시실까지 모두 관람을 마친 뒤, 기념품 숍은 포기한 채 미술관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남편과 부모님은 미술관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시간 동안 셋이서 뭐 하고 있었냐고 물으니 카페에 앉아 쉬었다고 했다.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폰도 하면서 쉬었다고.


남편에게 팔짱을 끼고 둘이 앞서 걸으면서 조용히 물어봤다. "셋이서 보낸 시간은 어땠어?" 남편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괜찮았어. 그런데 장모님이 자기한테 잽을 자주 날리시잖아. 근데 나랑 셋이 있으니까 그 잽이 나한테도 조금씩 날아오더라고." 여행 내내 엄마가 내게 사소한 잔소리들을 하는 걸 두고 남편은 '잽을 날린다'는 표현을 써왔다. 이번에는 내가 없으니 엄마의 잔소리가 남편에게로 향했었나 보다. 나 대신 엄마의 잽(?)을 속수무책으로 맞았을 남편을 생각하니 안쓰럽고 미안함과 동시에 웃음이 나왔다.


반대로 남편이 내게 전시가 어땠냐고 물었다. 전시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터라 나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너무 거대한데다 생동감이 넘쳐나서 조금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다고. 함께 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못내 아쉬워하는 남편의 표정을 보고 재빨리 덧붙였다. "그래도 어쨌든 조각상은 조각상일 뿐이니까. 내 옆에 이미 이렇게 살아있는 다비드 조각상이 있는데 뭐."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다 함께 피렌체의 야경을 보기 위해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벌써 이탈리아 여행의 중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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