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낯선 문화 2. 훔치고, 막는 창과 방패의 대결
이탈리아에서 현지 가이드들을 만날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말이 있다. 바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것. 사실 유럽의 소매치기들은 악명이 높기도 하고, 지인이 직접 소매치기를 당한 적도 있기 때문에 익히 알고 있긴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지인이 소매치기에게 휴대폰을 도난당하는 바람에 현지 경찰서에 가서 진술까지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에도 소매치기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0년대까지도.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 뒤늦게 집에 돌아와서 보니 내가 아끼던 가방이 커터칼로 길게 그어져 있었다. 처음엔 어디서 스친 건가 싶어 엄마에게 이야기하니, 소매치기를 당한 거라고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세계적으로 놀라울 정도로 소매치기를 발견하기 어렵다. 카페에 휴대폰과 노트북, 가방을 그대로 두고 자리를 비워도 돌아와 보면 모든 물건이 그대로 있다.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빠르게 발전한 덕분이다.
하지만 유럽은, 특히 이탈리아는 여전한 것 같다. 건물이나 시스템이 변하지 않고, 전통을 고수하는 만큼 소매치기 같은 악습도 쉽게 바뀌지 않는 걸까. 심지어 소매치기 문화는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점 더 고도화되고 교묘해지고 있다고 한다. 로마에 거주하는 가이드는 요즘 소매치기들이 갈수록 뻔뻔해져서 훔치다가 중간에 걸려도 상대방을 향해 씩 한 번 웃어주고 유유히 자리를 떠난다고 했다. 마치 '내가 이번엔 실패했지만, 조심해. 내가 언제 또 다가갈지 모르니'라는 듯이 말이다.
이쯤 되면 소매치기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른 나라가 아닐까 싶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만큼 소매치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피해를 보면 나라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안 좋아질 수밖에 없는데 정부에서는 배 째라는 식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관광 산업이 발달할수록 소매치기도 하나의 산업처럼 거대해져서, 강경하게 막았다가는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지경이 돼버려서 이렇게 흐린 눈을 하는 것일까. 가이드에게 듣기로 요즘 이탈리아 소매치기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여서, 지하철이나 도심이 아니라 관광객들이 자주 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자주 출몰한다고 한다. 그나마 그곳은 티켓값이 비싸서 소매치기 청정구역에 가까웠는데, 이제 소매치기들도 '투자'라는 걸 한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오는 일이다.
막으려면 막을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작년에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파리시는 소매치기에 대한 집중 단속을 실시한 적이 있다. 그때 파리의 소매치기 피해가 대폭 줄어들어 치안이 놀랄 만큼 좋아졌다는 통계가 있었다. 그 기간 동안 파리 소매치기들이 모두 다른 유럽 전역으로 옮겨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
반면에 이탈리아의 소매치기들은 그냥 대놓고 활개를 친다. 특히 지하철에서. 가이드가 소매치기 몇 명을 특정해서 사진을 찍어 알려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소매치기들의 인상착의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하고 또 굉장히 작고 여리게 생겼다. 맘이 약한 남편은 소매치기를 보고 오히려 불쌍하다며, '어쩌다가 저 애는 소매치기라는 일을 하게 되었을까' 하면서 안타까워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그 정도로 엉망진창은 아니었다. 정부에서 소매치기들에 흐린 눈을 하고 있는 대신에, 이탈리아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자정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실제로 일반 시민들이 관광객들을 위해 소매치기를 단속하는 광경을 몇 번이나 목도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만난 선의의 이탈리아 인들에 대해. 편의상 그들을 소매치기 주의를 준다는 뜻에서 '소매치기 알리미'로 표현한다.
처음 만난 소매치기 알리미는 로마의 트레비 분수대 근처에서였다. 희년을 앞두고 청소 중이던 트레비 분수가 다시 열린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희년을 축복하기 위해 왔다가, 명소인 트레비 분수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거리에 득시글 거렸다.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서 꼭 기차놀이를 하듯 촘촘히 걷고 있을 때였다. 어떤 키 큰 이탈리아 남자가 큰 소리를 무언가를 외치면서 대열에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이탈리아어로 무언가를 크게 외치면서 다니니 사람들의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함께 이동하던 가이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저 남자 바로 앞에 소매치기가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외치고 있는 거예요." 가이드 말을 듣고 보니, 남자 앞에서 잔뜩 얼굴을 구기며 걸어가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이탈리아어는 할 수 없지만 그녀의 표정은 잘 읽을 수 있었다. 상대를 잘못 만나서 오늘 장사는 허탕 치게 생겼다는.
두 번째로 만났던 소매치기 알리미는 지하철에서 마주친 역무원이었다. 로마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했는데, 아빠가 티켓을 잃어버린 거였다. 그런데 운이 나쁘게도 나머지는 모두 개찰구를 이미 통과한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나갔다가 들어와야 하나 하고 있는데 우리를 본 역무원이 다가왔다. 그는 티켓이 없어도 일반 신용 카드로도 결제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해 줬고, 아빠는 카드로 개찰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빠르게 이동하려는데, 갑자기 역무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와 남편을 불러 세웠다.
우리가 혹시 뭔가를 또 잘못한 걸까 싶어서 잔뜩 졸아있는데 역무원은 더듬거리는 영어로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너희가 여행 중에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어. 특히 너희 부모님과 여행을 떠난다면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천천히 떠듬떠듬 영어로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서 다음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바로 소매치기야. 이제 저 계단을 내려가면 정말 많은 소매치기들이 있을 거야. 열차를 탈 때는 꼭 이렇게 가방을 붙들고..." 그는 우리가 혹여나 자신의 영어를 못 알아들을 것을 염려해 직접 가방을 쥐는 모션까지 취해가며 우리에게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알려줬다.
한 번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데 갑자기 어떤 이탈리아 여자가 다가와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지하철에 특히 소매치기가 많다는데 혹시나 이 여자도 소매치기가 아닐까 싶어 잔뜩 긴장해서 뒤를 돌아봤다. 여자는 멀리서 걸어오는 한 여자를 조심스럽게 눈짓으로 가리키며 나지막이 내게 말했다. "저 사람 소매치기인데 네 가방 조심해야 해. 너희 가족들도." 여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느샌가 우리 곁으로 다가온 소매치기는 그 여자를 힐끗 보고, 나를 또 한 번 힐끗 보더니 씩 웃으면서 다음 칸으로 천천히 넘어갔다.
소매치기의 행동에 소름이 돋았다. 그 여자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여자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소매치기는 우리를 타깃으로 하려고 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소매치기들의 뻔뻔함을 제대로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번거로울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가 소매치기 알림을 해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소매치기들은 이탈리아 현지인들에게는 웬만하면 접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소매치기 수법에 대해 잘 모르고, 여행 중이라 현금을 많이 들고 다닐 수밖에 없는 어리숙한 관광객들도 충분히 넘치니까. 그래서 현지인들은 소매치기에 무신경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관광객들의 안전을 돕고 있었다. 소매치기를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행동임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이탈리아 젊은 층을 대상으로 소매치기를 골탕 먹이는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리는 것이 유행으로 번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물론 소매치기를 막는 것을 넘어, 사람을 골탕 먹이고 이걸 유튜브에 올리는 것은 도가 지나친 감이 있지만, 어쨌든 이탈리아 내에서도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소매치기를 막으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건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들 덕분에 나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소매치기로부터 내 가방과 가족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 내가 만난 세 명의 소매치기 알리미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그들 덕분에 나의 이탈리아 여행이 행복한 시간으로만 기억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