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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현지식은 쉽지 않아

20년만에 피자 앞에 다시 마주한 아빠와 나

by 콩딘이

이탈리아에서 드디어 제대로 된 현지식을 맛볼 차례였다. 밀라노 번화가에서 구글 켜고 샅샅이 뒤져 평점이 높고 괜찮은 곳을 선별해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피자와 파스타, 리조또, 밀라노를 대표하는 송아지 정강이 요리인 오소부코, 그리고 하우스 와인을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들이 차례 차례 나와서 맛을 봤는데 뭐랄까. 한국식 자극적인 파스타에 길들여져 있던 내 입맛에는 조금 심심하게 느껴지는 맛들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점심시간에 현지인이 바글바글하게 모여있던 식당이었는데도 말이다.


대신 하우스 와인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한국에서 먹던 쌉싸름하고 목넘김이 불편한 와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향도 좋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와인을 곁들이니 현지 음식들도 그런데로 먹을만 했다. 그렇게 남편과 내가 음식을 싹싹 비워가고 있는데 우리 부모님은, 특히 아빠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어린시절, 부모님과 처음 피자를 먹으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불현듯 어린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가족들과 피자헛으로 외식을 하러 갔을 때였다. 당시 우리 가족의 외식 장소는 항상 마포의 한 돼지갈비집이었다. 골목마다 돼지갈비집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집이었는데, 매번 갔음에도 불구하고 질리지 않고 항상 맛있었다. 특히 그 집에서는 갈비를 먹고 난 후에 꼭 살얼음이 동동 뜬 식혜를 후식으로 내줬었는데, 뜨거운 불판 앞에 오랜 시간 앉아있다가 마시는 그 식혜가 너무 달달하고 개운해 어떨 때는 갈비보다 식혜를 더 기다릴 때도 많았다. 그렇게 평화롭던 외식의 어느 날에 반기를 든 것은 나였다. 이제 돼지갈비 말고 다른 것 좀 먹어보고 싶다고 한 것이다. 내가 제안한 메뉴는 피자였다.


9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피자헛이라는 브랜드가 들어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집 근처에서 파는 피자 맛을 흉내낸 어설픈 피자빵 말고 제대로 된 피자를 맛보고 싶었다. TV 광고 속에 등장하는 피자헛 매장의 모습도 당시 10살 남짓이던 내 눈에는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좌식으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이리저리 숯불을 나르는 점원들 틈바구니의 돼지갈비집을 벗어나, 아늑한 노란 불빛 아래 폭신한 소파같은 의자가 있는 피자헛 매장에 둘러앉아보고 싶었다. 피자를 들 때마다 주욱 길게 늘어나는 피자 치즈를 보고 해맑게 웃는 4인 가족의 모습도 나를 그곳에 꼭 가보고 싶게 만들었다. 한참 어릴 때였으니 처음 접해보는 서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이 매우 클 때였다.


자식이 그렇게까지 원하는데, 부모 입장에서 모른척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조르고 졸랐던 어느 날 우리는 피자헛으로 외식을 하러 가기로 했다. 피자헛에 가게 되다니. 늦은 오후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네 식구가 함께 피자헛으로 향하던 길의 설렘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피자헛 점원이 우리를 가족석으로 안내했다. 저녁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피자헛은 돼지갈비집처럼 붐비지 않고 한산하고 아늑해보였다. 동생과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떨리는 마음으로 메뉴판에서 콤비네이션 피자를 가리켰다. TV에서 본 바로 그 피자를. 뜨거운 피자가 나오고, 그렇게 처음 접하게 된 미국식 피자의 맛이란. 기름지고 느끼하면서도 매콤하고 달달하기도 한 낯설지만 너무나 만족스러운 맛에 '세상에 이런 음식이 다 있나' 하면서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행복한 기억을 안고 돌아와 며칠이 지난 후 그 맛이 다시 생각나서 엄마에게 피자 헛에 가자고 또 졸랐다. 그런데 엄마가 못말린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는 거였다. 아빠가 피자를 먹고 온 다음 날 다 토해버리셨다는 거다. "넌 다음날 아침에 아빠가 토하는 소리도 못 들었니? 엄청 컸는데." 아뿔싸. 30년을 넘게 오로지 한식만 먹어왔던 아빠에게 느끼한 서양인의 음식은 쉽사리 소화해내기 힘든 종류였던 것이다.


찬찬히 더듬어보니 아빠는 당시 피자헛에서피자 한 조각도 제대로 못 드셨던 것 같았다. 그때는 단순히 나랑 동생이 너무 맛있게 먹어서 양보한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도 입맛에 잘 안맞으셨던 거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아빠란, 한없이 크고 강한 존재다. 그런 아빠가 피자 앞에서 쉽게 무너지다니. 게다가 약한 사람들의 전유물인 구토까지 하다니. 처음 피자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던 주범(?)인 나는 엄마의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그날 이후로 엄마 아빠에게 다시는 피자를 먹자는 소리를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이탈리아 현지에서 부모님과 다시 피자를 마주하다

문득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 전 회사 동료들의 조언이 생각났다. 이탈리아 여행을 함께 갔던 부모님 때문에 하루에 한 끼는 한식을 먹어야 했다고 푸념했던 동료, 애초에 부모님이 그러실 걸 예상해 누룽지와 햇반, 라면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녔다는 동료 등등. 현지식이 입맛에 안 맞으시는 건 비단 우리 부모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생각해보니 피자헛 사건이 있고 난 후부터는 아빠와 식사를 할 때는 한 번도 피자나 파스타 같은 서양음식을 먹으러 가본 일이 전무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샌드위치 보다는 김밥을, 빵 보다는 떡을 선호하는 아빠의 확고한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한 번 아빠 엄마와 함께 피자 앞에 마주하게 됐다. 이번에는 피자헛의 피자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본고장에서. "아빠, 어때 먹을만 하세요?" 시장이 반찬이라고, 아침도 대충 빵과 커피로 때운 상태에서 점심까지 늦어진터라 아빠는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드시기는 했다. 음식이 입에 맞냐는 물음에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으로만 답하셨지만 말이다. 피자가 사라져갈때즈음 아빠가 또 호텔에 돌아가서 다 게워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러면서 아빠의 마음을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딸이 먹고싶어하는 걸 같이 먹어주는 마음에 대해서. 사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는 일이라는 게 참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30대인 나만 해도 그렇다. 어떤 음식이 나랑 맞는지 안 맞는지, 좋아하는지 아닌지 호불호가 점점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린 시절 골뱅이 무침을 먹고 급체를 한 후부터는 10년 넘게 골뱅이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지인이 을지로의 엄청난 골뱅이 맛집에 데려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빠에게도 피자란 그런 음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첫 이탈리안식을 시작으로 9일의 동안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한 끼는 꼭 현지식을 먹었는데, 그때마다 피자는 항상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맛있게 드셔준 아빠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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