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에서 만난 스타벅스와 맥도날드, 그리고 두오모 대성당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자다가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는데,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3시. 혼자서 뒤척이는데 옆에서 자던 남편이 말을 걸어왔다. "잠이 잘 안와?" 남편도 잠에서 깨버린 거였다. 첫날부터 시차적응에 완벽히 실패했다.
다시 잠이 올 때까지 캄캄한 호텔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다가 이렇게 갑자기 이탈리아에 오게 됐는지, 여기와서 꼭 가보고 싶은 장소는 어디인지 등등. 나는 로마가, 남편은 바티칸이 제일 기대된다고 했다. 냉담자에 가깝지만 그래도 힘들 때는 성당에 가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온다는 남편이기에 바티칸이 가장 기대될 수밖에 없는 듯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벌써 아침 6시가 됐다.
오전 8시쯤 숙소에서 출발하자고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바로 답장이 왔다. 아직 6시밖에 안됐는데 엄마 아빠도 시차적응에 실패한 듯했다.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숙소에서 미적거리느니 좀 더 일찍 출발하면 어떨까 싶었다. 다같이 7시반쯤 숙소에서 나와 번화가도 둘러볼 겸 목적지인 밀라노 대성당 근처에 아침을 파는 카페를 찾았다. 구글 평점을 믿고 찾아갔는데, 막상 가보니 현지인들이 바쁜 아침에 들르는 가성비 넘치는 카페였다. 현지인들의 문화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지만, 이탈리아 관광의 공식적인 첫 날이다보니 좀 더 특별한 것으로 배를 채우고 싶어 간단하게 커피와 빵만 맛보고 그곳을 바로 빠져나왔다.
천천히 밀라노의 아침 풍경을 따라 길을 걸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하고 맑았다. 조금 춥고 쌀쌀하기는 했지만 양지로 가면 따뜻하고, 그늘로 가면 서늘한 날씨였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지만 한국에서처럼 매서운 겨울 바람은 아니라 슬렁슬렁 걸어다닐만했다.
가는 길목에 거대한 스타벅스 매장을 만났다. 이탈리아에도 스타벅스가 들어와 있을 줄이야. 커피에 진심인 이탈리아가 이런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을 받아주다니 의외였다.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 같다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밀라노 스타벅스 내부는 아침부터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이미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온 터라 따로 메뉴를 시키지는 않았지만 간략하게 훑어보니 빵 종류의 디저트 퀄리티는 꽤나 괜찮아 보였다.
스타벅스를 나와 좀 더 걷다보니 맥도날드도 있었다. 느긋하게 식사하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에 패스트푸드점이 웬말인가 싶었다. 그리고 기어코 이런 나라에까지 침투한 미국 거대자본의 위력에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스타벅스처럼 그냥 지나치려는데 남편이 맥도날드에서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해외 여행을 갈 때마다 그 나라의 맥도날드를 꼭 가보고 싶어하는. 남편이 그런 부류였나보다. 반면에 나는 한국에서도 맥도날드는 절대 가지 않는 편이라 굳이 이탈리아에 와서까지 가야하나 싶었다. 그런데 엄마도 아빠도 처음 갔던 카페에서 배가 채워지지 않았는지 가고 싶어하는 눈치라 잠깐 들르기로 했다.
맥도날드에서 커피와 요깃거리가 될만한 간단한 디저트를 주문했는데, 왠걸 이탈리아는 맥도날드마저도 커피 맛이 꽤나 수준급이었다. 카푸치노를 시켰는데 한국에서 먹던 구수하고 씁쓸한 가루맛 커피가 아니라 부드럽고 진한 맛의 커피가 나왔다. 디저트도 가격대비 괜찮은 수준이라 꽤나 만족스러웠다. 나중에 가이드를 통해 들었는데 이탈리아는 워낙 전국민이 커피 맛에 대한 수준이 높아서 웬만한 카페들은 적당히 커피를 내려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했다.
여차저차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밀라노 대성당 앞에서 가이드를 만났다. 운 좋게도 이번에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이 우리 가족 뿐이라 우리끼리만 프라이빗하게 투어를 들을 수 있었다. 성당으로 이동하면서 가이드가 말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밀라노에 비가 많이 내렸었다고. 겨울은 사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우기인데 기후 변화 때문에 요즘은 비가 잘 안온다고 했다. 겨울이 이렇게 건조해지는 덕분에 여름은 더욱 습해져서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기후위기 때문에 고통받는 현지인들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되지만 속으로는 한시름 놓기는 했다. 비가 많이 올 거라 생각해 실망이 컸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어제 도착하자마자부터 날씨가 내내 화창하더라니. 전 세계적으로 기후위기 때문에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더니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천만다행으로 우리가 돌아다니는 9일 내내 비는 커녕 먹구름 하나 없이 쨍쨍한 날씨는 계속됐다.
드디어 마주한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은 예상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바깥에서부터 뽐내는 위용이 이미 대단해서 압도될 정도였는데 내부는 그보다 더 아름다웠다. 우리는 가장 위층에 올라가 꼭대기부터 구경했는데, 수십개로 뾰족하게 올라간 탑들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탑 하나하나마다 다 천사와 성인의 얼굴을 한 조각상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조각상들이 모두 사람들이 직접 조각했기 때문인지 가지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모습은 단 한개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성당 하나를 완성하는 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매달렸을까 생각하니 저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탑을 내려와 성당 내부를 둘러보는데 또 한 번 놀랐다. 성당 내부 창문이 여러 색깔로 주조된 스테인드 글라스로 이뤄져 있었는데, 강한 햇빛이 비쳐오면서 스태인드 글라스가 오색찬란한 빛을 내면서 반짝거렸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엄숙한 성당 분위기와 맞물려 오묘하게 이질적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빛이 비쳐오는 글라스 덕분에 성당도 따로 불을 밝혀두지 않아도 저절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대성당을 나와 가이드가 추천해준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한 잔 더 마시고, 밀라노의 랜드마크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아케이드에 갔다. 쇼핑 매장들이 줄지어 늘어선 아케이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모두 가족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나온 것 같았다. 번잡한 아케이드를 지나 가이드와 함께 스칼라 극장, 스포르체스코 성을 차례대로 둘러봤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장장 4시간동안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며 관광을 하다보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기 시작했다. 이제는 관광을 마치고 점심을 먹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