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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낯선 나라 톨게이트에서 벌어질 뻔한 아찔한 해프닝

by 콩딘이

밀라노로 향하는 13시간의 비행은... 예상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의 좌석이 유독 좁게 설계된 탓인지 절반 정도 지난 시점부터 엉덩이뼈가 콕콕 쑤시고 아파왔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내가 이렇게 힘들다 느낄 정도인데 180이 넘는 장신인 남편은 얼마나 힘들까 싶어 맘이 불편했다. 게다가 떠나기 전날까지도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무리해서 야근을 한 남편이었기에 더 맘이 쓰였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 다 아직은 청춘이라곤 하시지만 젊은 사람들보다는 몇 배는 더 힘들 텐데 이 장시간 비행을 어떻게 버티시는지, 나는 저 나이가 되면 절대 저렇게 못할 것만 같아서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모두가 피곤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드디어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도착했다. 완전히 뒤바뀐 시차에 좁고 불편한 비행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였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여행의 시작이니 모두 정신을 잘 부여잡아야 했다. 특히 여행을 계획하고 책임지는 내 역할이 막중했으니, 나부터 깨어 있어야 했다. 낯선 타국에서 세 사람을 책임지고 안전하게 호텔까지 데려가는 게 내 첫 번째 임무였다. 피곤한 얼굴로 내 지시를 기다리는 세 사람에게 이제부터는 각자의 가방과 핸드폰을 단단히 단속해야 한다는 말을 던지고는 선두에 섰다. 도무지 멈추지 않는 하품 때문에 연신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억지로 졸음을 쫓으면서 터벅터벅 공항 안을 걸어 나갔다.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긴장 모드로 돌변했다


입국 수속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다음은 이번 여행의 핵심 교통수단인 렌터카를 대여할 차례였다. 사실 렌터카는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 중 하나였다. 예약은 이미 온라인으로 해둔 상태였지만, 업체가 어디에 있는지, 대여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남편과 둘이 떠나는 여행이었다면 이런 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거였다. 공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물어보거나 길을 헤매면 됐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엔 환갑이 넘은 부모님이 동행했다. 두 분의 체력을 최대한 아끼는 게 우선이었기에, 공항 안에서 불필요하게 시간을 허비하거나 헤맬 여유는 없었다.


다행히도 입국장을 나서자마자 렌터카 대여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데로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고 있는데 성격 급한 아빠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날 불렀다. "너희 아빠 또 혼자서 저 멀리까지 가신다." 모두 멈춰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하는 지점에서 아빠 혼자 직진해서 100미터나 앞서서 걸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급한 성격은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 소리쳐도 들릴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남편이 달려가 아빠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여차저차 찾게 된 렌터카 업체에서는 예약 번호를 보여주니 순조롭게 차량을 대여할 수 있었다. 운전자는 남편만 등록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빠가 나타나서 본인도 같이 운전을 하고 싶다고 등록해 달라고 하셨다. 이번 여행에서 남편이 혼자 운전을 도맡아 하려면 너무 피곤할 것 같으니 본인이 부담을 나눠 들고 싶다는 거였다. 남편은 한사코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이미 국제운전면허증까지 준비해 오신 상태였다. 나 역시 장기간 여행에서 남편 혼자 운전하기는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빠도 함께 등록하기로 했다.


렌터카 직원은 우리에게 차 키를 건네며 운이 좋게도 새 차를 쓰게 됐다고 했다. 우리가 예약했던 차보다도 더 좋은 차라면서. 주차장에 가보니 진짜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차가 준비돼 있어서 무척이나 좋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4인용 소형차를 빌린 탓에 캐리어 네 개가 트렁크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캐리어 자리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렌터카를 대여한 내 실수였다. 이탈리아가 좁은 도로를 운전할 일이 많다고 해서 괜히 큰 차를 대여했다 긁힐 수도 있을 것 같았고, 비용적인 부분에서도 훨씬 절약일 테니 조금 작은 차를 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차에 짐을 실으려니까 트렁크 자리에는 2개밖에 안 들어가는 거였다.


결국에 트렁크에 2개, 나머지 2개는 뒷좌석에 싣고, 부모님은 뒷좌석에서 한자리가 조금 넘는 좁은 구역에 함께 끼어 앉아 첫 주행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일정부터는 내 캐리어를 버리고 남편 캐리어에 짐을 넣는 식으로 캐리어 개수를 줄였다. 언젠가는 버려야지 했던 오래된 캐리어를 들고 왔던 게 다행이었다.)


초행길 운전, 불안 불안하더니만 일이 터졌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차로 45분. 모두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운전석에 앉은 남편이 졸리진 않을까 옆에서 계속 말동무도 돼주고, 내비게이션도 확인하면서 이동했다. 내비게이션은 모든 게 이탈리아어로 돼 있어서 처음에는 애를 먹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쓰던 거랑 시스템은 비슷해서 금방 익혔고, 루트는 구글과 동일하게 잘 나오는 것 같아서 일단은 믿고 출발했다.


모든 것이 예상보다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입국도 잘하고, 짐도 잘 찾고, 아픈 사람도 없고, 렌터카도 좋은 차를 잘 대여했다. 이대로 모두가 안전하게 호텔로 도착하기만 하면 오늘 일정은 끝이었다. 한가득 쌓아놓고 있던 불안함을 조금 내려놓으니 그제야 차창 밖에 펼쳐진 이탈리아의 야경이 보였다. 밤 9시가 넘어 캄캄해진 밀라노 고속도로를 달리며 앞으로 어떻게 여행을 꾸려가면 좋을지, 이번 여행은 내게 어떤 의미로 남았으면 좋겠는지 생각하며 상념에 빠졌다.


그렇게 한참 감상에 젖어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어? 하면서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톨게이트를 만난 거였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어느 쪽 줄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판단할 새도 없이 우리는 한쪽 입구로 차를 몰아세웠다. 그런데 운 나쁘게 그곳은 카드를 내는 쪽도 현금을 내는 쪽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뭔지 잘 모르겠다.) 차단바가 내려가 있었는데 차가 가까이 다가가도 바는 올라갈 생각을 안 했다. 어?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뒤에 또 차가 올까 봐 쉽게 후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 돼버린 거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주변의 차들을 바라보며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성미 급한 아빠의 성격이 또 발동했다. 갑자기 뒤에서 차가 오는지 확인하겠다며 뒷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남편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차를 조금씩 후진하기 시작했다. 문을 여는 아빠와 후진하는 차. 움직이는 차 안에서 문이 열리니 차량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고, 순간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소리를 질렀다. 아빠! 그렇게 말도 없이 차 문을 열면 어떡해! 모든 게 낯설고 두려운 상황에서 누구 하나 사고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어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아빠는 내 소리에 놀라 바로 문을 닫았다. 엄마는 그런 와중에 '하이패스를 안 만들어왔냐'라고 물었다. 그런 걸 우리가 어떻게 알고 준비해왔겠어...


그 순간, 표현은 못했지만 헤매고 있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남편에게 신신당부했던 딱 한 가지가 바로 운전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준비는 내가 다 할 테니 운전 관련된 것만 알아봐 달라고. 고속도로 운전부터 주차, 주유, 교통 법규까지. 그런데 미리 알아본다던 남편의 데이터에 톨게이트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쩌나 하면서 상황을 살펴보고 있는데 옆 줄에 나이 든 이탈리아 부부가 경적을 울리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뭐라 뭐라 말하고 있는 것 같길래 뭔가를 알려주려는 것일까 싶어서 후진했던 차를 다시 차를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신기하게도 아까는 안 열렸던 차단 바가 다시 열리는 거다. 어? 이게 갑자기 왜 이러지? 이렇게 그냥 출발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또다시 가만히 있다간 문제가 더 커질 것 같아서 일단은 차를 몰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도착 첫날부터 신고식을 제대로 했다


고속도로를 겨우 벗어나 밀라노 시내로 접어들 무렵, 톨게이트에서의 아찔했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만약 성격 급한 아빠가 그대로 내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작게는 차 문이 긁히는 걸로 끝났을 수도 있지만, 자칫 크게 다치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이렇게 아무 탈 없이 지나간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문득 아빠를 너무 몰아붙인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실 아빠도 우리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나선 거였을 텐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버렸으니. 출발하기 전에 절대 부모님에게 짜증 내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건만, 도착 첫날부터 그 다짐을 깨버리고 말았다.


운전하는 남편에게 슬쩍 물어봤다. 그런데 아까 그 이탈리아 사람들 말이야, 우리 도와주려던 거였을까?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표정 보니까 완전 욕하는 것 같던데? 아, 그랬던 거구나. 괜히 도움받은 거라 생각하며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질 뻔해 민망했다. 첫날부터 톨게이트에서 우왕좌왕하며 신고식을 제대로 치른 셈이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아, 우리가 정말 이탈리아에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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