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척척 해내는 부모님을 보고, 조금은 안심이 됐다
안될 이유를 생각하면서 골머리를 앓느니, 어떻게든 그 안에서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러니까 비가 많이 오면 실내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위주로 투어를 꾸리면 될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식당들이 열지 않을 것을 대비해서 에어비앤비를 숙소로 잡았다. 밖에서 사 먹는 것도 맛있겠지만 현지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다가 함께 음식을 만들어먹는 것도 그 나름의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불행 중 다행인 건 모든 일정을 렌터카로 이동하기 때문에 최소한 비를 쫄딱 맞으며 캐리어를 끌고 이리저리 걸어 다닐 일은 없다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희년에 대한 것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쓰리지만, 그래도 이번 여행의 목적이 많은 것을 보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가족들과 재미있는 추억을 만드는 데 있는 만큼 거기에 집중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니 세부 스케줄을 짜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어느 도시에 며칠간 머물지 생각하면서 막힘없이 계획을 짜다 보니 드디어 대망의, 이탈리아로 떠나는 날이 됐다.
출발하는 날 새벽에 비행기 연착 소식이 문자로 날아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연착되니 한 시간 정도 더 늦게 와도 될 것 같다고 했는데 들려오는 엄마의 푸념 섞인 목소리. "우리 이미 출발했어." 목소리만 들어도 대강 상황이 짐작됐다. 좀 더 천천히 출발해도 될 것 같다는 엄마와 그래도 절대 늦으면 안 되니까 준비 다 했으면 그냥 지금 가자는 아빠.
엄마에 따르면 이번 여행에서 아빠는 거의 의견을 내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그냥 우리만 잘 따라다니겠다고. 그래서 계획을 세울 때 두 분의 의견을 물어봤었는데 그냥 너희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처음에는 이탈리아를 다녀온 엄마가 의견을 내려고 했더니 아빠가 옆에서 "애들이 그냥 하자는 대로 하자"며 엄마를 말렸다고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실 필요는 없었는데 싶어 고맙고 미안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내가 두 분에게 그동안 어떤 딸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본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이야기하지도 못하는 무뚝뚝하고 고집 센 딸은 아니었을까 하는. 조금만 더 친근하고 살갑게 굴었다면 나는 여기도 꼭 가보고 싶었다거나, 이거는 꼭 먹어보고 싶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지금보다는 쉽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괜히 죄송스러웠다.
그런데 이런 민망함과 죄송스러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그냥 알겠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것밖에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이렇게 어려운가 보다. 대신 위생에 대한 기준이 높은 아빠를 위해 가능하면 깨끗하기로 평이 높은 호텔을 잡으려고 노력했고, 체력적으로 힘들 수 있을 두 분을 위해 오전에만 투어 일정을 잡아놓고 오후는 자유시간으로 두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엄마아빠를 공항에서 만났다. 이제 짐도 부치고 출국 수속도 하려는데 엄마가 셀프 수화물 서비스와 스마트 패스를 알려줬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그간 공항은 참 많이도 업그레이드돼 있었다. 셀프로 수화물을 부칠 수 있는 서비스가 생겼다니. 스마트 패스로 이렇게 빠르게 출국이 가능해졌다니. 그런데 더 놀라웠던 건 이걸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줬다는 거였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내가 상상했던 그림은 캐리어를 든 채로 하염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아빠의 모습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와서 캐리어와 여권을 가져가 체크인을 하고 수화물을 부치고 함께 출국하는 거였다. 그런데 이미 두 분이서 다 알아서 출국 수속을 다 마치고서는 커피까지 한 잔 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한 달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하시더니 거기서 나타나는 연륜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젊은 사람들보다도 시스템을 빠르게 이해하고 척척 해내는 두 분의 모습을 보니 남편도 "와 장모님 대단하시네요" 감탄하면서 엄마를 추켜세웠다. 나 역시도 속으로 놀라면서 이번 여행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는 나름의 기대가 생겼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이국 땅에서 자식들에게만 의지해 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이 부모님에게 어렵게만 느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분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번 여행을 재미있게 즐길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