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낯선 문화 1.
많은 한국인들이 유럽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에게 가까운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어디서 본듯한 풍경과 익숙한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보니 완전히 새롭다는 느낌을 받기가 어렵다. 그런데 유럽은 다르다. 도시 외관부터 차이가 크다. 잘 포장된 시멘트 바닥과 높은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서울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날아가면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2천 년이 넘도록 한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건축물들과 작은 돌들을 여러 개 맞춰 다져놓은 울퉁불퉁한 돌바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큰길 사이사이에 위치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들, 거리 곳곳에서 졸졸졸 물이 흐르는 자그마한 식수대와 그곳에 손을 받쳐 들고 물을 마시는 현지인들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 낯선 외형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게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인들의 삶에 대한 태도였다.
물론 고작 일주일 조금 넘게 머문 주제에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을 운운하냐고 하면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래도 그곳에서 수십 년 거주한 가이드들에게 들은, 그리고 짧은 순간이나마 내가 마주쳤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생활상을 조금이나마 추측해 볼 수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와는 많이 달라 꽤나 흥미롭게 느껴졌던 삶의 태도에 대해서 말이다. 이번 글은 그런 인상적인 순간들 중에서도 이탈리아인들의 느긋함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오전에는 현지 가이드들과 함께하는 투어를 주로 다녔는데 그때마다 지역 가이드들이 항상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인들은 너무 느긋하다는 것이다. 특히 뭐 하나 수리하려면 한참이나 걸린다고. 미술관을 오를 때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는 데 몇 년은 걸려서 한 여름에 관광객들을 데리고 높은 계단을 오르느라 진땀을 뺐다는 가이드, 지하철 역에 에스컬레이터를 수리하는 데 몇 달씩이나 걸려서 내내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고 푸념하는 가이드 등등. 로마에 가서는 판테온의 입장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로마시에서 1년을 넘게 토론한 덕분에 매번 입장할 때마다 입장료를 받고 있는지 체크하는 게 너무 번거롭다는 가이드까지 만났다. 이런 느긋한 태도는 비단 건축물의 수리뿐만 아니라 행정에도 반영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 역시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한국에서는 식당에 가면 손님이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아 메뉴를 주문한다. 좀 더 빨리 메뉴를 주문하기 위해 테이블에 벨이 배치돼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식당에 들어서면 웨이터가 자리를 안내해 줄 때까지 앞에 서서 기다려야 한다. 자리를 안내받으면 메뉴판을 볼 수 있는 시간이 길게 주어진다. 그리고 메뉴를 다 고른 후에는 주문하기 위해 웨이터와 눈을 맞출 때까지 또 하염없는 기다림이 이어진다. 주문을 마치면 그때부터 천천히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모두 마치면 웨이터가 테이블을 치우고 계산서를 가져다줄 때까지 또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빠른 일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인들로서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다. 그런데 나에게는 오히려 이런 이들의 느긋함과 여유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성격 자체가 급한 데다가 빠르게 실패하고 빠르게 성공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 스타트업에서 일한 지 오래되다 보니 이렇게 천천히 모든 일들을 처리하는 것 자체가 새롭고 독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느긋하게 만들었을까.
먼저 그들을 살펴보기 전에 나는 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봤다. 사실 빠르면 여러모로 좋은 게 많다. 한국에서는 남들보다 먼저 교과 과정을 공부하면 또래들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고, 그러면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 좋은 대학에 가면 더 좋은 직장을 찾을 수 있고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그럼 그렇게 많은 돈을 벌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러는 내내 우월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 같다. 같은 나이 또래의 누군가보다 앞서간다는 우월감. 그런데 그 우월감이 가져다주는 건 말 그대로 우월감일 뿐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도태되거나 소홀해지는 것들은 어떨까. 흔하게는 가족이나 친구 같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당장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소홀해지거나 포기하게 되는 것들. 드라마나 영화에서 숱하게 봐왔던 클리셰이지만 이런 것들은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는 경우들이 많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빠르게 산다는 것에 지쳐있었던 것 같다.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그 시간들이 좋으면서도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나보다 어린, 또는 내 또래인 누군가는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제자리걸음 같아서. 여기서 안주해서는 안돼,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렇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돌아온 날이면 어딘가 모르게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자기 만족감을 느끼며 쉬지 않고 달리다가 어느 날은 몸에 무리가 왔는지 주말 이틀을 통째로 쉬게 된 날이 있었다.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내내 누워서 주말을 흘려보내는 데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건 물론 과거의 내가 열심히 달려왔기 때문이지만 그래서 이제 조금은 삶을 돌아볼 여유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조급함과 불안함이 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진 않은지 돌아봤다. 빠르게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재촉하고 몰아붙이지는 않았는지. 남편과 가족에게 소홀하게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오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러면서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조금은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며 사는 삶. 이탈리아는 왜 이렇게 식사 시간이 기냐는 물음에 가이드는 나에게 이렇게 답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식사 시간을 단순히 배를 채우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회적인 교류를 나누며 관계를 돈독히 하는 시간이라고.
느리고 게으르다고 생각할뻔한 그들의 식문화에는 이런 뜻이 숨겨져 있었다. 한 방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들의 삶의 지혜가 식사 시간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이탈리아에 와 있는 동안 만이라도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보기로 했다. 로마에 오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여행의 목적도 바꿔버렸다. 당초에는 이탈리아에 온 이상,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되도록 모든 걸 다 구경하고 오겠노라고 치열하게 다짐했었는데 이제는 여유롭게 즐기면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오는 것으로 바꿨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문화가 일견 부럽기도 했다. 물론 오랫동안 멈춰있는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여전히 번거롭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번거로움이 있기에 모두가 좀 더 느긋하게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견딜만했다. 이탈리아인들도 그런 이유 때문에 느린 속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빠르게 무언가를 바꿔주기를 바란다면 나도 같이 빨라져야 할 테니까. 나 혼자만 느리게 살 수는 없고, 그렇다고 혼자만 빠르게 살 수도 없을 테니까. 만약 나도 이들처럼 삶의 속도를 조금만 늦출 수 있다면, 계단을 한 번씩 오르내리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출근하는 첫날 아침, 지상으로 올라가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 있었다. 회사에 출근해 보니 열흘 넘게 밀려있던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점심도 샌드위치로 때우면서 밀려있던 일들을 하나 둘 처리하다 보니 금세 퇴근 시간이 돼 있었다. 퇴근길에 다시 만난 에스컬레이터는 언제 멈췄었나 싶을 정도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만 하루도 안 걸렸다. 이탈리아인들이 이걸 보면 얼마나 놀랄까. 빠르게 움직이는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실감과 함께, 나처럼 어딘가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에스컬레이터 수리기사가 떠올랐다. 이탈리아의 느긋함이 갑자기 그리워졌다.